‘얼굴만 예쁘면 다냐, 마음이 예뻐야지’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겸손함이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말로 흔히 쓰여왔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정말로, 마음이 예뻐야 한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제품이 아닌 화장품 브랜드가 표방하는 가치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뷰티 브랜드가 런칭하는 시대. OEM¹ 시스템이 발전함에 따라 이제 누구나 자본만 있으면 화장품을 개발하고 포장해 판매할 수 있다. 한 해 안에도 수많은 브랜드가 생겨났다 사라지고, 그해마다 마치 짠 듯 브랜드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문구들이 있다. 3년 전 즈음만 해도 그건 ‘더마,’ ‘연구,’ ‘성분’이었다. 그러나 1-2년 전부터 브랜드들은 ‘셀프케어(Self-care),’ ‘라이프 스타일,’ ‘감각’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세균 하나 없을 것 같은 새하얀 연구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근엄하게 진피와 피부 자극에 대해 설명하던 이들이, 이제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사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더마’와 ‘감각’ 사이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이다. 이솝의 브랜드 페이지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솝은 세심하게 고안된 효과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스킨, 헤어, 바디 케어 제품을 제공합니다.’ 이솝의 제품들은 피부 타입에 맞게 성분과 제형을 달리하는, 일련의 요법(Regimen)적인 접근을 취하며, 제품 디자인도 간결하고 건조하다. 갈색 병에 유효 성분과 사용법을 줄글로 적어놓은 디자인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카피를 낳았으며, 우리가 ‘이솝’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단박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코닉한 디자인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이솝의 향이다. 성분과 유형에 무관하게 이솝의 대다수 제품엔 에센셜 오일 베이스의 허브 향이 사용된다. 소비자가 제품과 브랜드를 직접 오감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 또한 이솝에겐 중요한 일이다. 모든 매장엔 제품을 직접 바르고 체험할 수 있는 세면대가 있으며, 매장의 조명은 약국이나 병원의 형광등보다는 편안한 카페의 백열등을 닮았다.
[이미지 출처] 이솝코리아 공식 홈페이지
피부 앞에 돋보기를 들이밀며 내 피부의 ‘문제점’에 대해 열띠게 얘기하는 더마 브랜드 대신 ‘건강한 피부’와 ‘풍족한 영혼’을 설파하는 이솝에게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소비자들에게 과학이란 이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며, 화학자가 아니어도 구글 검색 한 번이면 외계어로 쓰인 듯한 성분의 용도와 유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화해’ 같은 화장품 성분 분석 어플과 인플루언서의 힘을 빌어 화장품 성분에 대한 정보를 소비자들이 막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엔 성분의 유해성이 뜨거운 감자였다. 너도 나도 10無 처방, EWG 레드 등급 FREE²를 외쳤으며, ‘히알루론산’은 뷰티 문외한도 얼핏 들어봤을 만큼 흔히 알려진 성분이 되었다. 이 ‘안전한’ 성분 트렌드의 최전선에 섰던 제품이 블리블리의 ‘인진쑥 밸런스 에센스’이다. ‘단일 성분 화장품³’을 표방한 이 제품의 압도적 성공에 힘입어 원씽, 너그처럼 아예 한 제품에 성분 하나가 주가 되는 브랜드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성분으로 제품을 차별화하기엔 한계가 존재한다. 꼭 그 브랜드가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다. 한정된 ‘안전한’ 성분과 OEM사, 유사한 제형의 바구니 속, 열심히 새로운 무언가를 뽑아보려고 애쓰며 ‘우리는 달라요!’라고 외쳐봤자 소비자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제품의 품질이 상향 평준화된 지금,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하기 앞서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얼굴이나 몸에 바르는 화장품의 기능을 떠나 ‘그 브랜드의 제품이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가’이다. 만족감은 다양한 곳에서 충족될 수 있다.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예쁜 디자인일 수도 있고, 자꾸 바르고 문지르고 싶은 제형일 수도 있고, 니치 향수 부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향기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온전히 ‘나’의 만족감을 위해 제품을 구매하고 바르는 행위는 ‘소확행’과 ‘가심비’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즐거운 일이다.
소비자들의 지갑을 여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을 브랜드의 팬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브랜드의 철학이다. 새로 런칭되는 브랜드들은 너도나도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라이프 스타일’은 단순히 소비자의 나이, 소득 수준, 지역에 따른 생활 패턴을 의미하는 듯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용어의 중심엔 가치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에 기반하는가, 아니면 오감만족을 위해 모든 면에서 최상의 원자재만을 사용하는가? 불편함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친환경적으로 브랜드를 운영하는가, 아니면 편리함을 추구하는가? 식물성 원료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피부에 효과적인 성분이라면 어떤 성분이든 사용하는가? 윤리적인 방식으로 구성원을 대하는가, 아니면 더 나아가, 브랜드가 생각하는 ‘윤리’란 무엇인가? 많은 회사에서 ‘먹히는’ 디자인, ‘트렌디한’ 디자인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에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을 만큼 브랜드의 일관되고 탄탄한 비전이 있다면 디자인과 브랜드의 무드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고, 브랜드가 표방하는 가치에 공감하는 소비자 간 커뮤니티도 자연스럽게 생성되게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많은 브랜드가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도출된,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대신 ‘트렌디한’ 가치를 표방한다는 점이다. 요즘 국내 스킨케어 브랜드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비건’과 ‘클린 뷰티’ 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비건’ 브랜드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해외 유수의 업체에서 비건 ‘인증’을 받았다는 말만 있을 뿐, 왜 그들이 비건을 지향하는지, 브랜드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잘 보이지 않는다. ‘클린 뷰티’는 더더욱 모호하다. 기존의 무첨가, 최소 성분 트렌드에 환경적 · 윤리적 지속가능성 이슈를 섞어놓은 듯한 ‘클린 뷰티’ 브랜드 중, 브랜드가 생각하는 ‘클린(Clean)’은 어떤 의미이고 그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브랜드는 거의 없다. 물론, 작은 변화들이 야기하는 긍정적 측면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원가가 비싸거나, 관리가 불편하더라도 더 큰 가치를 위해 비용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은 존중받아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많은 화장품이 최소 생산 수량만큼도 채 판매되지 않아 폐기되는 지금, 끈질긴 고민 없이 생산된 제품과 브랜드가 ‘클린 뷰티’를 표방한다고 해서 과도한 생산과 폐기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⁴
그런 의미에서 요즘 ‘클린 뷰티’를 표방하는 퍼스널 케어 브랜드 중 눈여겨볼만한 브랜드는 미국 브랜드 네쎄세어(Necessaire)와 국내 브랜드 아로마티카(Aromatica)이다.
네쎄세어는 소비자가 남긴 폐기물을 활용해 제품 단상자를 제작하며, 천연펄프로 제작된 종이는 사용하지 않는다. 택배 박스는 100% 소비자 폐기물을 활용해 만들어지며, 인쇄 잉크 또한 재활용된 잉크를 사용한다. (네쎄세어의 다음 미션(Mission)은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용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쎄세어를 진정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노력보다 브랜드명에서 유추할 수 있는 ‘필요성’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의 철학이다.
What We Believe (우리가 믿는 것)
It has to be Necessary.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The ingredients we choose
(우리가 사용하는 성분)
The products we develop
(우리가 개발하는 제품)
The facts we share
(우리가 공유하는 사실)
The experts we interview
(우리가 인터뷰하는 전문가)
The footprint we leave behind
(우리가 남기는 생태 발자국)
네쎄세어가 취급하는 카테고리는 바디케어에 한정되어 있으며, 여기엔 무향 섹스 젤도 포함되어 있다. (필요한 제품만을 개발한다고 주장하는 브랜드에서 섹스 젤을 출시했다는 건 그것 자체로 브랜드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 된다.) 12개의 ‘단출한’ SKU는 제품명부터 직관적이어서 (The Body Wash, The Body Serum) 별다른 설명 없이도 소비자는 제품의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네쎄세어가 굉장히 건조하고 재미없는 브랜드처럼 들리겠지만, 놀랍게도 네쎄세어의 제품들은 럭셔리하게 느껴진다. 제품 디자인을 살펴보면, 용기 형태와 색상은 미니멀하지만 클래식한 세리프 폰트가 사용되어 유서 깊은 호텔처럼 고풍스럽고 섬세한 느낌이 들며, 촉촉하게 젖은 듯한 몸의 피부와 제품의 텍스처를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풍부하고 아름답다. 몸을 씻고 가꾼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를 기분 좋은 셀프-케어 리추얼(Ritual)로 만드는 네쎄세어의 브랜딩은 그들이 동일한 기능을 가진 제품을 어떤 식으로 계속 발전시킬지 기대하게 만들며, 철학이 확고한 인디 브랜드가 어떻게 브랜드를 전개해나가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미지 출처] 네쎄세어 공식 트위터
아로마티카는 네쎄세어만큼 세련되고 정제된 브랜드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아로마티카는 2004년에, 네쎄세어는 2018년에 런칭되었으며 가격대 또한 아로마티카가 훨씬 저렴하다) 최근 리브랜딩을 통해 제품 디자인과 브랜드 미션(Mission)을 정비하고 선보이는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노력이 주목할 만하다. 아로마티카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환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마케팅 캠페인을 벌이는 국내 화장품 브랜드 중 거의 유일하게 ‘지속가능 경영 선언문’이 있으며, 제품뿐만 아니라 회사의 경영 방식 측면에서도 생태 발자국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9년 11월 아로마티카는 헤어 · 바디와 세제 품목에 한 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제품 대신 유리 공용기와 내용물 리필을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리필 용기로 사용되는 비닐 파우치가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거나 생분해되는 재질은 아니지만, 비닐 파우치는 플라스틱 용기보다 쓰레기의 중량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PET 용기 대비 플라스틱 사용량 86% 감소) 단일 플라스틱 용기보다 나은 대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
소비자의 일상에 녹아들며 즐거움을 주는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화장품 브랜드가 진화할 수 있을지는 결국 브랜드의 철학이 단순한 마케팅 기믹(gimmick)을 넘어 진정성이 있는지, 그리고 소비자들이 그 브랜드의 가치와 취향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지금, 뷰티 브랜드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¹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제품의 기획과 실제 생산이 다른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 제조 공장을 갖고 있는 큰 기업이 아닌 이상 대부분 국내 화장품 브랜드의 제품은 OEM 방식으로 콜마, 코스맥스 등 제조업체를 통해 생산된다.
²EWG(Environmental Working Group) 생활용품부터 농업까지 다양한 산업군에서 사용되는 화학 성분에 대한 유해도를 구분하고 '유해한' 성분의 사용을 비판하는 미국의 기관.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EWG는 공공기관이 아니며,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 과도한 유해성 제기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³단일 성분 화장품 '단일 성분'이라고 주장하는 화장품은 100% 자연 성분만 사용한 것처럼 광고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전성분에 '녹차추출물'만 적혀있을지라도 화장품 원료 안에는 기본적으로 원료가 썩지 않게 도와주는 보존제나 피부에 촉촉함을 보유하는 보습제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원료사들은 이러한 보존제와 보습제를 용매로 활용하여 성분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표면상 '단일 성분'을 만든다.
⁴환경을 위한 3R 운동은 Reduce(쓰레기를 줄이고), Reuse(재사용하고), Recycle(재활용하는) 것이다. 다양한 뷰티 브랜드에서 화장품 용기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지만, 사실 꼭 필요한 제품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더 적은 생태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패션·뷰티 업계의 과도한 생산과 팔리지 않은 품목에 대한 폐기는 오랫동안 '관행'처럼 이루어졌으나, 2020년 1월 프랑스는 화장품을 비롯한 의류·전자기기의 재고 폐기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아마존, LVMH 같은 거대 리테일러는 이제 폐기 대신 기부 등의 방식을 통해 팔리지 않은 재고를 처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