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연 Oct 31. 2018

여름의 빛

 


두해 전, 나는 조금 이상한 일을 겪어야 했다. 초여름과 함께 찾아온 한 남자와 그의 검은 피부만큼이나 반짝이는 여름을 보냈지만 길고도 짧았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를 잃어버렸다. 나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그를 이해해보려 했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계절로 가야 했다. 깊어진 가을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돌아왔지만, 우리는 겨울의 매서운 한파를 맞았고, 찬바람에 내 정신이 번쩍 들자 그 이상한 관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완전히 끝이 났다.
 
 그가 사라진 여름을 지나는 동안 나는 마치 그런 좋지 못한 일을 기다린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가라앉고 곤두박질쳤다. 매일 아침 잔뜩 부은 눈으로 욕실 거울을 바라보면 그런 내 모습이 그렇게 미우면서도 그 속의 생동을 잃은 거뭇하고 흐린 눈동자가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아침부터 또 한바탕 실컷 쏟아낸 다음에야 조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일을 혼자서 하던 시기이니 아무도 내 부은 눈두덩이에 의문을 품는 이는 없었다. 정수리를 녹여버릴 것 같은 따가운 여름 해를 피하는 척, 얼굴을 모두 가리는 챙이 큰 모자를 쓰면 그만이었다.
 
 그때의 그 일은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도 눈을 때리는 밝은 여름빛이라던가, 아이들의 구김 없는 순수함과 천진함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고개가 자꾸만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어쩐지 그것들을 온전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해가 긴 여름에는 다른 계절들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내 기준으로는 조금 지나친 그 밝음 들을 견뎌내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면 최대한 어둡게 최소한의 빛으로 생활하며 낮동안 따갑게 타들어간 마음의 열기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가쁜 숨을 돌렸다. 그럼에도 손 쓸 겨를 없이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부분은 맥주와 영화와 시집과 내 개의 온기로 채우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었다. 여름이 끝나면 다 끝날 것 같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조금 나아질 것이라 여기며 매일매일 달력을 들여다보곤 했다. 엄마의 기일이 있는 10월이 되면 다시 곤두박질칠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얼른 여름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고단한 일주일을 견뎌내고 금요일이 되면 나는 늘 마음에 큰 구멍이 뚫린 듯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아주 약간의 좋은 마음이라던가, 희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막연하고 의미 없는 것들은 여기저기로 스르르 다 흘러가버리고, 너절해진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잔뜩 풀이 꺾인 채, 그만큼이나 고개도 푸욱 꺾인 채 터덜터덜 엉금엉금 집으로 돌아갔다. 비린내와 땀내가 섞인, 소란하고 진득한 하루를 버텨낸 무거운 몸과 마음을 겨우겨우 걷어올리며 걸어야 했다. 아무런 소리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몸과 마음을 이제 그만 소비하고 싶었다. 습관과 강박의 중간쯤인 운동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그저 얼른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만이 물집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의 작고 늙은 개가 기다리는 그곳, 냉장고 안의 차가운 맥주가 기다리는 그곳, 타인에 의한 아무런 속상함과 괴롭힘도 없는 그곳이 너무나 절실해지는 것이다.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한다. 방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나른한 개를 무릎에 올리고, 차가운 맥주를 홀짝이며 그 날 퇴근길에 떠올린 영화를 본다. 영화가 끝나면 남는 맥주를 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똑같이 생긴 빌라 4채가 마주 보는 작은 이면도로가 보이는 풍경의 전부지만 그래도 나간다. 한 모금 두 모금 삼키다 보면 어쩐지 누군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어올 것만 같아서 괜히 조용한 그 골목을 한동안 바라보게 된다. 아무도 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맞은편의 불 꺼진 빌라들을 바라보며 비워낸 맥주 캔들을 구기고 방으로 들어온다. 방공호 같은 작은 방 안에서야 나는 겨우 숨통이 트인 것인지, 맥주의 청량함에 기대 헤묵은 마음이나 미련 같은 것들을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고 모른 채 하게 되는 것인지 조금 헷갈렸지만, 그때만큼은 어떤 꿈도 꾸지 않고, 달고 깊은 잠에 빠질 수가 있었다.


 등허리에서 느껴지는 매트리스의 뜨거운 열기에 무거운 눈꺼풀을 올려 잠에서 깨면 해는 이미 중천이다. 하지만 에어컨을 켜면 조금 더 잘 수가 있다. 여기저기 손을 더듬어 리모컨을 찾는다. 그때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 반짝인다. 그리고 이내 사라진다. 헛것일까? 빛이 반짝일 수 없는 높이였다. 어젯밤에는 보이지 않던 반짝임이었다. 신기루 같은 어른거림이 하얗게 일렁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순간, '오늘은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 걸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정말로 그런 걸까 봐 조금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베란다로 나가는 유리문을 살금살금 조심히 열어 정체를 확인했다. 문을 열자 싱거운 웃음이 났다.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테이프였다. 빌라들을 가로지르며 어지럽게 연결된 케이블에 박스테이프가 뱀처럼 길게 늘어뜨려져 너풀대고 있었다. 테이프는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바람에 느적느적 흔들리다가 각도가 맞아떨어지면 강한 여름 해를 순간적으로 반사해 천사 같은 하얀 반짝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나풀거림이 이상하게 밉지가 않고, 또 그 애매한 높이에 걸린 테이프를 일부러 정리할만한 사람도 없으니 세찬 바람에 날아가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계속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내 방에서만 볼 수 있는 작은 신기루가 생긴 셈이었다.


 그 날은 여느 주말과는 달리 조금은 힘이 났다. 더 많은 확실한 빛에 꿉꿉했던 마음을 조금 말려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얼굴을 가리는 큰 모자를 쓰지 않고 해를 바로 보며 강변을 오래오래 걸었다. 강물에 반사된 수많은 반짝임 들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늘 하얗게 웃어주던 엄마가 그 하얀빛을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라고, 젖은 마음도 환한 빛에 바짝 말리면 다시 깨끗한 새것이 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테이프는 여전히 그대로 그 자리에서 너풀거리고 있고, 나는 여전히 꽤 자주 울지만, 그래도 꽤 자주 웃으며 올해 여름을 지나고 있다. 


 스스로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날의 빛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미세하지만 가장 확실한 본인만의 특별한 빛을 알게 모르게 매일매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을 유일하게 알아봐 주는 사람을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다. 꼭 그럴 것이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