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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31. 2018

계절과 함께 나아간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들판의 무수한 꽃과 초록들이 늘 익숙했다. 언제나 주변에 있었기에 당시에는 소중함과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성인이 된 나는 도망치듯 도시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연은 빽빽한 빌딩들 사이의 획일화된 가로수들이 유일했고, 외제차들이 먼지를 뿜어대고 날 선 사람들만이 가득한 어느 동네에서는 그 마저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반지하에 살며 번화가로 일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첫차를 타고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잘 가꿔진 식물들에 둘러싸여 일을 했지만, 거기에서는 어떠한 생명력이나 자연의 힘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늘 생기가 넘치고 윤이 나 반짝이는 반면, 나는 녹음은 고사하고 한 줌의 햇볕마저도 사치일까 할 정도로 자괴감에 빠져 마음이 못나게 젖어있던 시기였다.


 쉬는 날이 되면 지난 일주일의 눅눅해진 몸과 마음을 말리고 순수의 초록을 뒤집어쓰러 공원이나 한강으로 가곤 했다. 공원에 도착하면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큰 나무 한 그루를 골랐다. 나무 아래로 걸어가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내려 비치는 작은 빛들은 고운 조각보처럼 내 얼굴을 덮어주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작고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꿈인지 꽃인지 하며 감긴 눈꺼풀 안에서 아지랑이처럼 어룽거렸다. 양 팔은 쭉 뻗어 손 끝으로 바닥을 쓸어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스륵스륵 지나가는 들풀들을 천천히 만지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을 다시 버텨낼 힘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나무에서 떨어지고,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미세한 작은 풀벌레들은 끝없는 움직임으로 나를 토닥여 주는 듯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뒤로는 가끔 꽃집에 들러 계절을 머금은 꽃이나 작은 화분을 사곤 했다. 작은 꽃 한 송이가 주는 감동은 실로 대단했다. 깨끗한 물과 적당한 크기의 화병만 주어지면 힘을 다해 자신의 예쁨을 발산하고, 무채색의 작은 방을 힘찬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집에 꽃을 들이기 시작한 뒤로는 화병도 조금씩 늘어갔다. 입구가 좁고 길어서 크고 화려한 꽃 한 송이 담기 적당한 것부터, 만개한 호박꽃처럼 넓게 펼쳐졌다가 가운데는 쏙 오므라들고 아래로 갈수록 다시 넓어지는 것까지.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구매 목록에 빈티지 화병을 강조해 적어두고 에어캡까지 챙겨가는 유난을 떨기도 했었다. 


 불면증이 심했던 시기, 계획 없이 새벽의 꽃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꽃집을 하는 사람들처럼 한 손으로는 들지도 못할 만큼의 꽃을 사버렸다. 신문지로 무심하게 툭툭 싼 색색의 생명들을 고이 받쳐 안고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등 뒤로 아침이 다가왔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아직 한밤중인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릴 때, 알 수 없는 타인의 눈빛이 나를 베어버리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줄기들을 감싸 쥔 손 끝의 축축함을 느꼈다. 꽃들의 잘린 줄기 끝마다 미세하지만 확실한 생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그것에 의지해 무거워진 발을 한번 더 내딛을 수 있었다. 


 꽃이나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레 한번 더 눈길이 가곤 한다. 누군가 내게 어떤 사람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기쁜 마음으로 꽃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던 때도 있었다. 늘 우리 가까이 있지만 그것을 돈과 마음과 시간을 들여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고, 선물을 받고 기뻐할 상대를 떠올리며 신중히 꽃을 고르는 마음이 예뻐서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마음이 가는 이들에게 간간이 꽃을 선물하곤 했다. 꽃집의 여러 꽃들 중 신중히 고른 몇 가지를 받아 안고 걷는 날은 평소 느릿하던 내 걸음걸이에도 속도가 붙었다. 이유 없이 모가 나있던 내 마음이 조금은 꽃처럼 해사해지는 듯했다.


 계절은 돌아 다시 가을이 왔다. 거리의 *플라타너스들이 너른 잎사귀를 흔들며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계절 말이다. 밤새 내린 가을비의 물기를 머금은 공원 산책로에는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을 지낸 능소화들이 떨어져 채 가시지 않은 선명한 붉음으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떨어진 꽃들을 피하며 천천히 그 길을 걸어 보았다. 아주 천천히 피어나지만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도 천천히 천천히 계절과 함께 나아간다.




*9와 숫자들 - 플라타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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