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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Nov 14. 2018

조금 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6개월 만에 다시 정기검진을 받았다.
수술을 한 지 1년, 작년 이맘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했다. 어쩌면 반쯤 나사가 빠져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작년 여름, 홀수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건강검진을 받았다. 기본 건강검진 후 일주일이 지났고 산부인과 검진에서 이상소견이 있으니 부인과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라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덜컥 겁이 났다.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상소견이라니.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추가 정밀 검사를 차일피일 미루다 언니가 서울에 있을 때 근무하던 병원을 예약해 검사를 받았다. 암 검진이라거나 조직검사라거나 하는 단어만으로도 나는 한껏 쪼그라들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지, 믿지도 않는 온갖 신들을 원망했다. 검사 결과가 나왔고 나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수술은 빠를수록 좋고, 수술 후에는 한 달 정도의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도시락 일이 가장 바쁜 9월, 10월을 앞두고 있었고, 겨울 안에 가게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었던 때라 시즌 동안은 경과만 지켜보고, 바쁜 시기가 끝나면 11월에 수술을 하기로 담당 선생님과 결정지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선뜻 말하기도 어려운, 그렇지만 생명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는 애매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며 가을을 보냈다. 어두웠다. 해마다 찬바람이 불면 가라앉는 마음은 늘 바쁜 가게일로 덮으며 보냈는데 그해 가을은 유독 마음을 걷어올리기가 어려웠다.
병원을 오고 가는 길은 사람들이 잘 걸어 다니지 않는 큰 대로변이었고, 떨어진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가득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낙엽들을 밟으며 병원으로 가는 그 시간이 너무나 더뎠는데 아무리 주먹에 힘을 주어도 자꾸만 어깻죽지가 말리고 고개가 떨구어졌다.
병원에서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차가운 진료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누울 때마다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가 생겨났다. 그렇게 11월이 되었고, 수술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수술실에 대한 공포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나치게 밝은 빛에 대한 공포이다. 16살 여름방학에 나는 수술을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귀 위쪽의 작은 구멍에서 고름이 나왔다. 고름의 양이 점점 많아져 수술을 해야 했는데 고름주머니가 신경과 뒤엉켜 시골에서는 수술이 어려웠다. 수술 전날 고향 근처의 중소도시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흔한 실비보험도 하나 들어있지 않던 상태였다. 그에게 나는 애먼 돈을 쓰기에는 아까운, 정이 없던 둘째 딸이었고 걱정보다는 병원비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다 나를 혼자 입원실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수술은 오전 9시. 전날 금식을 하고, 수술 전에는 전신 마취를 해야 했다. 엄마는 아침에 첫차를 타고 병원에 오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3인실에서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나를 깨우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8시 반, 수술실로 이동을 해야 하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보호자가 없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아.. 엄마가 아직 안 왔어요. 오는 중이래요' 하고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로 이동하는 침대에 누웠다. 머리에는 하얀 망이 씌워졌고, 새하얗고 빳빳한 수술용 시트가 목까지 덮어졌다. 얇은 수술용 옷만 입어서 그랬는지 여름인데도 한기가 들었다. 내가 누운 이동침대가 병원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눈을 감는 것이 무서워 천장을 봤는데 지나치게 밝은 형광등 불빛이 슥슥 지나갔다. 침대 바퀴에 속도가 붙자 빛은 점점 빠르게 내 뒤로 넘어갔고, 엘리베이터 속 빼곡히 선 사람들 사이 나는 혼자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힐끔거렸다. 보호자 없이 혼자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아이를 그들은 당연히 신기해했고 나는 그 시선들을 견디기가 어려워 눈을 꼭 감아버렸다. 병실에서 엘리베이터로, 엘리베이터에서 수술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수술실에 들어서자 여러 명의 의료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시트채로 들어져 수술대로 옮겨졌고 걱정 말고 푹 자고 나면 끝날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났고, 마취에서 깨 눈을 뜨니 엄마가 와있었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원망과 안도가 뒤섞인 울음을 토해내었다. 왜 이제 왔냐고, 혼자 수술실 갈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냐고 엄마 품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엄마는 미안 미안 내 등을 토닥이며 네가 좋아하는 호떡도 사 왔고, 고등학교 가면 신을 구두도 사 왔다며 나를 달랬다.


병원에서는 경과를 지켜봐야 하니 일주일은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럴 돈이 어딨냐며 수술 다음날 곧바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 병원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엄마는 애를 벌써 퇴원시키면 어떡하냐며 화를 냈고 그와 큰소리로 싸웠다. 마침 장례식장 앞을 지나고 있었고, 길에 나와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봤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싸우는 소리,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만 나서지는 않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지긋지긋했다. "제발 그만하고 가자! 제발!" 나는 엄마를 잡아끌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무서웠다. 엄마에게 욕을 퍼붓는 그의 눈은 이미 반쯤 돌아있었고, 그런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수술부위를 압박하는 붕대를 머리에 감은채 엄마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날 이후 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병원에서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그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며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주일 후, 수술부위가 다 아물었을 테니 실밥을 풀자고 했다. 나는 '아 드디어 병원에 가는구나' 하고 안도했지만 그는 자신이 군의관 출신이니 실밥 정도는 직접 풀 수 있다, 병원엔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그의 말에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모로 누웠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훔치며 그가 시키는 데로 가만히 수술부위를 내어주어야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하얀 형광등 불빛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지나치게 밝은 불빛에서는 눈을 뜨는 것과 감는 것 중 어느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군가의 무릎에 얼굴을 내고 눕는 일도 없었고, 웬만큼 아프지 않고서는 병원에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결국 그때 제대로 된 처치를 하지 못해 나는 아직까지도 주기적으로 고름을 짜내고 소독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작년 수술 날에는 내 사정을 잘 아는 친한 언니가 병원에 동행해주었다. 수술실에 혼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수술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꾸준히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부위이고, 나는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시간이 금세 흘러 수술 후 오늘 두 번째 정기검진을 받았다.


지난 일 년 사이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름이 바뀌고, 10년 동안 쓰던 번호가 바뀌고, 하는 일이 바뀌고, 성격도 꽤 많이 변했다.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 정신없이 바쁜 일과들을 버텨내며 중심을 지키고 나를 잃지 않는 것이 정말 어렵고 중요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이 불안해질 때마다 속으로 '천천히 천천히'를 되뇐다. 어차피 나는 마음만 급하지 실행을 빠르게 하는 사람은 아니고,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또 어쩌면 때때로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내 손을 떠나야만 해결되는 일도 있는 걸 테니까.


순간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옛날 일들이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악몽 같은 괴로움의 파도가 나를 덮치면 나는 여전히 그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도 나는 변할 수 있는 사람이고, 잘은 못해도 열심히는 하니까.'라고 생각하며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내고 있다. 짜고 매운 바닷물 밑으로 힘없이 고꾸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디지만 발을 구르고 팔을 저으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걸 테니까.


내년에는 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겨있을까. 나는 또 얼마나 자라 있을까.

어쩌면 나이를 먹는 것이 그리 나쁜 일만을 아닐 것이다.

나는 더 많이 나아진 내가, 조금 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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