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탁! 당근 써는 소리에 기분 좋게 몸을 뒤척였다.
꼬시한 참기름 내음, 기름에 볶은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진 익숙하고도 생경한 냄새가 코 끝에 와 닿는다. 밥 냄새에 저절로 눈이 떠진 게 얼마만일까?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너무나 잘 기억이 나는 그 냄새가 내 온몸을 감싸고 나를 일으킨다. 그래 이건 김밥이야..!
서울살이 11년 만에 나는 다시 가족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과는 살았어도 가족과는 안 산 지가 어언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이제는 내 이름 아래 무려 세명의 식솔이 딸린 세대주가 되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여름의 한가운데, 나는 송파구 여기저기를 한 달가량 휘젓고 다녀야 했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야 하고, 강아지를 기를 수 있으며, 지금 내 직장에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지하철로 바로 다닐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닥치면 뭐든 하게 되는 게 사람이라고. 우리는 송파동의 오래된 골목 가운데의 작은 빌라 4층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이사를 들어왔다.
어느덧 이사를 온지도 두 달이 넘었고 이제는 조금은 아늑해진, 사람이 사는 집 같아진 '우리 집' 된 우리 집.
그중 부엌 옆 작은 방이 내가 강아지와 함께 지내는 방이다. 개인 공간의 크기는 줄었지만 대신 공용공간이 넓어졌다. 10년이 넘게 원룸에서 자취를 한 내게 옷방이 따로 생기고, 작은 거실이 생기고, 부엌이, 베란다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원룸이 아닌 곳에 사는 기분은 조금은 낯설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선 건 '이모는 주무시는 중이니깐 아침에는 이모 방에 들어가면 안 돼'라고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언니의 목소리와, 그런 엄마 말을 안 듣고 내 방에 살금살금 들어와 가만히 강아지를 쓰다듬는 어린 손가락들이다. 팔을 뻗으면 자연스레 품에 파고 들어와 키득거리는 아이들. 옷 사이로 드러난 나의 맨살을 가만가만 만져보는 아이들의 작고 보드라운 손은 너무나도 낯설고도 자연스러워 간혹 이런 것이 행복일까 싶은 착각에도 스르륵 빠져버리기도 하며.
오늘은 작은 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이다. 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도 김밥을 말았다. 김밥이라니...!
나는 김밥이 너무 좋다. 집에서 만든 김밥이 제일 좋은데 아무리 맛있는 김밥집에서 김밥을 사 먹어도 그 맛이 안 나서 매번 김밥이 사 먹고 싶다가도 김밥이 사 먹기 싫어지고 그런다.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17년 동안이나 맡아보지 못했던 그 냄새가 오늘 아침 우리 집에서 나고 있었다. 너무나 간절했던 '엄마 김밥'의 냄새 말이다. 언니가 요리를 잘 하지만 엄마나, 10여 년간 요리사로 살았던 나보단 아닐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내 무의식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완벽한 나만의 착각이라고 명치를 때리는 듯한 엄마 김밥 냄새가 내 코를 간질였다.
이불을 둘둘 말아 뒤집어쓴 채 식탁에 앉아 김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흡사 김밥을 못 먹어 죽은 귀신처럼.
내가 좋아하는 유리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김밥에는 당근과 시금치, 단무지와 햄이 들어있다. 작은 아이의 입 크기에 맞춰 조그맣게 말아둔 그 김밥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언니는 정말 엄마가 되었고 나는 두 조카의 이모가 되었고, 우리 집에는 이제 나 혼자 살지 않는구나. 나는 다시 엄마 김밥을 먹을 수 있구나. 아 맛있겠다...
의식의 흐름이란 이렇게도 단순하고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복잡 미묘한 것인지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던 날의 아침이 오버랩되어 아른거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소풍 가는 날 아침은 뭔가 모르게 들뜨고 했던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신나는 공기와 기운의 8할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엄마의 김밥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불을 칭칭 감은 김밥 귀신은 랩을 씌어둔 접시를 요리조리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아이가 '이모 김밥 먹을래?'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응' 하고 짧게 대답했고 아이는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젓가락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거대한 김밥 귀신이 된 기분으로 작은 젓가락으로 조그만 꼬마김밥을 두 개씩 집어 날름날름 먹었다. 아이들은 또 그게 신기하다며 '이모 두 개씩 먹어?!!!' 하고 놀란다. 아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짜릿한 행복인가.
수많은 의문들에 정답이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차가운 가을 아침이 되었다. 옷장에 넣어둔 긴팔 옷들을 꺼내 입히고 선풍기들은 하나만 남기고 모두 들어갔다. 지난 주말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취기가 조금 오른 언니는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게 얼마 만에 잡아보는 손일까 헤아려보다 금세 손을 떼었지만 한동안 그 촉감이 손 끝에 남아 기분이 묘했다. 늘 아이들에게 손을 잡으라고 말하지만 막상 우리는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이나 오랫동안 손을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향수에 젖은 그 밤에 우리는 마트에 들러 엑설런트 한곽을 샀다.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한참을 서있다 엑설런트를 집어 든 내게 언니는 아빠가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다.
다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시기가 있었다. 아무도 내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기분에 빠져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깰까 봐 살금살금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현관에는 크고 작은 신발들이 뒤엉켜 나를 반긴다. 잘 정돈된 듯 하지만 여기저기 아이들의 물건이 흩어져있다. 화장실에는 인어공주 그림이 그려진 칫솔이 있고, 내 방에는 기다란 여자아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매일매일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침이면 소란스러운 등교 준비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나는 다시 가족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https://youtu.be/xfRljrjRpFQ 이승환 -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