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사온 트리플륨을 무심하게 툭 담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오는 밤에도, 천근만근인 몸을 뒤척이다 겨우 눈을 뜨는 아침에도 늘 가장 먼저 꽃이 보이는 자리.
오랜만에 주말을 오롯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생겨 그간 쌓아두기만 했던 책상 위의 종이뭉치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작년에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모아둔 종이들은 어느새 내 것과 남들의 것이 마구 뒤엉켜 500여 장이 넘게 쌓여있었다. 그때의 내 글들은 심상찮게 우울했고, 나는 자주 울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즉흥적으로 지내온 내 과거들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나는 주로 엄마 이야기로 글을 썼는데,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기 고선 엄마를 생각할 틈도 없이, 쉬는 날은 집에 붙어있는 꼴이 없이 주말마다 맹렬히 도 그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번은 만났고, 내가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며 일주일 중 유일하게 쉬는 토요일은 따로 떨어져 보낸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갔다.
갑작스러운 지방발령으로 그는 멀리 부산으로 떠났다. 나는 전혀 계획에 없던 장거리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일주일 정도를 시시때때로 울었다 화냈다 괜찮았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나의 격한 감정 변화들과는 상관없이 어느덧 예정된 날짜가 다가왔고, 그는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며, 또 조금은 무덤덤하게도 부산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그간 정신없는 연애 초반을 보내며 둥글고 몽글해졌던 내 마음속에 숨어있던 들쭉날쭉하고 모난 마음들이 '드디어 우리 차례다!' 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꼭 이럴 때만 엄마가 보고 싶다.
나는 엄마 얘기만으로도 정당하게 우울해 할 수 있는 이유가 적어도 일주일치는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데다 여기에 연애 100일을 갓 넘긴 시점에 애인의 지방발령까지 더해졌으니! 이보다 완벽한 이유는 또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애인은 부산으로 갔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혼자 남은 나는 혼자이던 이전의 시간들을 복기했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강아지와 달리기를 하고, 혼자 영화관에 가고, 혼자 밥을 먹던 예전의 일상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없는 첫 일주일 동안 나는 마음먹은 것과 달리 거의 니힐리스트처럼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했다. 아 역시 옛말이 하나 틀린 게 없구나.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이렇게나 크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을 한지는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애인이 지방으로 갔고, 오랫동안 따로 살던 언니가 서울로 돌아오게 되어 함께 지낼 계획을 하고 있다. 나는 슬금슬금 내 거취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도시락 가게를 정리하던 당시에는 다시는 장사할 생각은 꿈에도 말자고 다짐했었지만, 어쩐지 다시 장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간간이 머리를 맴돌았다. 아니 내가 다시 그 고생을, 그때보다 6살이나 많은, 이제는 누군가 나이를 물어올 때 짐짓 머뭇거리게 되는 제법 늙어진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딱 해답을 정할 수가 없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엄마의 첫 번째 가게는 '쉬리'
쉬리라는 영화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2000년의 한 해 전인 1999년에 개봉해 전국적인 흥행을 했다. 아마도 그때 당시 크게 흥행한 그 영화의 제목을 따서 엄마의 첫 가게 이름이 지어진 게 아닐까 추측해보지만 엄마가 쉬리라는 영화를 실제로 보았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엄마는 쉬리를 하면서 '맛자랑 이모'와 친해져 매일 내게 맛자랑 이모 얘기를 했다. 맛자랑 이모가 손맛이 너무 좋아서 식당 장사가 잘된다고 칭찬을 했지만 그 말의 끝엔 자신도 어디 가서 음식 못한다 소리는 안 듣는다는 말을 꼭 고명처럼 곁들이곤 했다. 쉬리의 영업실적이 어땠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내게 파나소닉 시디플레이어도 사주고 일제 키티 샤프도 사준 걸로 미루어 보건대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던 걸로 짐작해본다.
하지만 엄마의 쉬리는 약 1여 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는 쉬리를 시작하며 2-3일에 한 번만 집에 들러 살림을 돌봐주며 천천히 우리와 생활을 분리했다.
-------------------------------------------------------------------------------------//5월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엄마가 올 때마다 조금씩 살림을 배웠다. 어느 날은 전기밥솥에 밥하는 방법, 또 어느 날은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정갈하게 널고 정리하는 방법 같은 것들 말이다. 엄마는 내게 살림을 알려주면서 한숨을 꽤 자주 쉬었는데 아마도 이제 겨우 14살이 된 딸에게 자신이 하던 다섯 식구 살림을 떠맡기는데서 오는 자책과 걱정 같은 여러 감정이 뒤엉킨 숨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법 살림에 재주나 흥미가 있는 편이었고, 엄마가 알려주는 살림들을 곧잘 배운 데로 따라 했다. 그의 까다로움에 맞추기 위해선 학교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면 숙제나 노는 것보다는 집안의 먼지를 닦아내고 모든 물건을 그가 정해둔 제자리에 두는 것에 시간을 써야만 했다. 자연스레 성적도 떨어지고,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마음 둘 곳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부모님이 이혼하며 내가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친한 친구들에게 털어놓은 비밀은 화살이 되어 내게 다시 꽂혔고,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고개를 점점 숙이고 걷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날 아주아주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애는 세상에서 가장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 찰나의 눈빛에 나는 역겹고 진저리 나는 벌레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날 이후 나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늘 책상에 엎드려있기만 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거나 내 존재를 기억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투명인간처럼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그 눈빛이 얼마나 뇌리에 깊이 박혔던지 나는 아직도 그 여자애의 이름과 얼굴을, 그때의 그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애는 아마 지금쯤 그런 일은 까맣게 잊고 살고 있겠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왜인지 내 존재가 작고 약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 애의 눈빛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곤 했다.
내 인생에 독이 되는 그런 존재들은 이제 그만 떨쳐내고 너절하게 구멍 난 마음들마다 좋고 따뜻한 것들로만 채워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지해주고 애정을 쏟아부어주는 이들의 노력에 이제는 나도 부응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내가 무얼 해서, 내가 어떠하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붙이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내 곁에 머물러주는 마음들이 있는데도 나는 아직도 자주 불안하고 무섭고 두렵다. 내가 좋아했던 여러 사람이 내 곁을 떠났거나 내 마음에 상처를 남겼고, 그럴 때마다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내어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불안의 심지가 위태롭게 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쁜 나날들 속에서 한동안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으며 시간을 허비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랐고, 한동안 어떤 글을 읽어도 잘 읽히지가 않아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시간은 흘러 이제는 정수리가 따가울 만큼 무더운 여름이 되어버렸고, 나는 요즘의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자판을 두들겨 보았다. 8월의 첫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