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_다랑쉬오름

오름에서 자유를 말하다

by 자유인

'다랑쉬'? 외국어인 줄 알았다.

알고 봤더니 순우리말이다. 나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이 오름의 진면목을 알고 싶었다.

어쨌든 올라가기로 했다. 거창한 입구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어설픈 주차 시설이 존재할 뿐이었다. 유명한 등산로면 보통 있는 막걸리, 파전집도 없다. 고장 난 먼지떨이 에어 장비를 옆에 낀 정자가 있고 바로 입구가 보인다.

창연히 빛나는 햇살이 어서 올라오라 나를 유혹한다. 1월에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햇볕은 발검음의 점프대가 되어 나를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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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은 조그마한 산체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전설에 따르면 오름은 설문대할망의 해진 치마폭에서 흙이 떨어져서 생겨났다고 하며, 지질 지형학적으로는 화산활동, 침식, 융기 등 다양한 원인으로 만들어졌다.

오름은 제주인의 삶의 터전이고, 목축의 근거지이자 수난 역사의 현장이며, 영혼의 고향이다. 오름은 뭇 생명들의 서식처이자 피난처이고, 지하수 함양지이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하는 전망대이자 야생화의 전시장으로 제주도 생태축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오름은 잘 보전하여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

그중에서, 다랑쉬오름은 구좌읍 세화리 산 6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분석구(scoria cone)이다. 해발 382m, 비고 약 220m, 분화구 깊이 1100m, 분화구 둘레는 1500m이다. 다랑쉬오름은 아름답고 화산체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다랑쉬오름을 오름 랜드바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어원은 다양하게 전해진다. 지역주인들은 분화구가 달처럼 둥글다 하여 다랑쉬, 월링봉 등으로 부른다. 학자들은 '높은 봉우리를 가진 오름'을 뜻하는 옛말 '달수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어원이 어쨌든 이국적 명칭 같지만 입에 촥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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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소박한 입구에서 대략적인 등산로 파악을 한 뒤 걸음을 옮겨본다. 오름의 매력이 뭐라고 사람들이 칭송할까 생각해 봤다. 평범한 초입에선 별 감흥이 없다. 좁은 산길엔 특이점은 없다. 그래 일단 올라가 봐야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리라 생각했다. 양쪽에 설치된 로프는 방향을 의미할 수도 있고 등반이 힘든 이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든 잘 구비가 되어있다.

내려오는 이와 올라가는 이가 겹치면 난처한 자세가 나온다. 예전 훈련소에서 복도를 지날 때 상관이 지나면 외쳤던 "좌우로 밀착"이 속으로 외칠 만큼 좁다. 이 소리 없는 외침을 분화구에 갈 때까지 몇 번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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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이상 올랐을 때 시야가 트인다. 저너머 일출봉이 바다와 함께 내 시선에 들어온다. 반가웠다. 약 10여 년 전에 일출봉에 올라가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육지에선 보기 힘든 이런 광경이 제주에선 흔한 광경이다. 눈에 다른 오름도 보인다. 이름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저마다 탄생에는 사연이 있으리라. 사람의 일생과는 비교 안 되는 세월의 흔적에 고개가 숙여진다. 단순히 반복되던 자연의 섭리가 최근 매우 짧은 기간에 극적인 변화를 겪은 셈이다. 인간이라는 생각이 가능한 소위 호모사피엔스가 창궐하면서 생채기가 난 이 오름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없던 길이 생기고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미미한 군생들이 지나다니기 시작한 거다. 다 품어주니 다시 오고 가고 변화가 가히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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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겨울은 갈색이다.

가까이 보이는 억새는 연한 갈색을 띠고, 너른 평야는 진한 갈색과 초록색을 함유한 갈색으로 구분을 스스로 진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가 가까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명암으로 구분되는 동양화의 거리감과 유사하게 드넓은 평지와 바다의 거리감이 그렇게 동양화처럼 느껴진다. 갈색 향기에 취해 잠시 호흡을 다듬어 본다.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엔 무채색이 드리워진 것을 본다. 정상의 풍경이 생각보다는 만족스럽지 못해서일까? 은근히 많은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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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가까워지니 길 좌우로 억새풀의 연주가 장엄하다.

힘들게 올라오느라 쓰인 에너지 부산물인 땀을 식히는 시원한 바람에 숨을 조정해 본다. 1월 중순이지만 영상 10도가 넘는 기온 탓도 있겠지만, 봄의 따뜻함이 밀려왔다. 두꺼운 파카 잠바를 옆구리에 끼고 내 발자국 소리와 억새풀의 협연을 기억에 담는다. '잊고 싶지 않아, 잊고 싶지 않아' 내 기억이 추억으로 전환되어 잘 보존되었으면 좋을 정도로 억새풀의 바람 스치는 소리는 그윽한 시원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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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절정, 분화구 앞에 없는 자리를 만들어가며 털썩 앉아 본다.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다. 분화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미 내 앞에 인생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묵상 중인 사람이 있었으나 거리를 두면 좋은 풍광을 놓칠 것 같다. 그래서 지근거리에 나도 털썩한 거다. 스마트폰도 보기 싫어 그냥 분화구를 쳐다본다. 높지는 않지만 힘들게 올라왔다는 편안함에 여기서 내려가면 먹을 점심에 기대감을 더해본다. 무심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상념에 빠진다. 아무 생각 없이 잠시 머물다 길을 재촉한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야 제각 기겠지만, 난 깊은 평화를 가지게 됐다. 그간 세속적 걱정에 마음이 편해지지 않은 순간이 많았다. 그 순간 나는 이 분화구 상층부에 있는 바람에 나의 이 쓸데없는 걱정의 덩어리가 휩쓸려가기를 바랐다. 손바닥에 편지를 쓰는 억새의 흔들림에 답장을 쓰고 싶었다.

"걱정 마, 걱정 마, 잘 될 거야,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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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의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순한 외길이니 고민할 것도 없다. 그냥 따라가면 된다.

보이는 길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다 평지를 걷다 보니

분화구가 보인다.

제주에 왔다고 꼭 일출봉을 가야 하는 건 아니듯이

이렇게 오름을 가도 제주의 향기에 빠지기엔 부족함이 없다.

나는 평화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