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없어 보이는 나에게 아빠가 해준 말이 있다.
"너는 때를 기다려야 돼.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야.
기다리는 시간이 좀 있을거야."
지칠 때 마다 저 말을 되뇌이면서 버텼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건희 딸이었어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돈을 뿌리면서,
시대를 만들어 달려갔을것 같은데 ㅋㅋㅋ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나는 예술가들은 그렇게 태어난다고 믿는다.
논바이너리나 마법사들처럼 예술가로 태어나는거지,
어쩔 수 없이 태어나서 예술행위를 해야만 하는거라고.
자본주의 세상에 태어나서 예술가로 살아가야한다.
초기 에스키스들
일찍부터 나는 어렴풋이 내가 원하는게 뭔지, 내가 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게 주변 사람들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때,
주변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친족들은
"너네집은 애 미술시킬 돈이 없어서 힘들거다. 그림은 뭐 아무나 시키니?"
그 당시 주변 지인들은
"미술이 돈이 되는거야? 누가 그림을 사? 그게 직업이야?"
한 10년 넘게 미술을 꾸준히 하다보면 저런말 하는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나를 예술가로 알고있는 사람들만 남게된다.
저런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
첨엔 좀 상처받겠지만 계속 듣다보면
'어 그래 잘가' 하고 끝이다.
내가 "순수미술"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은건 재수생때였다,
그 시절 한국에서 입시미술을 하는 애들은 대부분 '디자이너'가 되는거였고
난 디자인과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 그림들이 재미가 없었다.
틀에 박힌 입시미술 주제들로
또, 그려야 하는 순간이 오자
내가 원하는건 이게 아니구나.
그리고 선생님께 말했다.
"쌤, 저 그만둘래요."
"니가 지금 뭘 하겠다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선생님은 미친듯이 화를 내셨다.
소리 지르시고, 씩씩거리며 노려보시다가
문을 쾅!! 하고 닫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고3때도 가르쳐주셨던 분이었다.
무서운 분이시긴했지만, 학생들이 다들 잘 따랐었다.
나도 선생님을 참 좋아했다.
원래 버럭쟁이 선생님이긴 하셨지만 그날은 유달랐다.
그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펑펑 울면서 집에 왔던게 기억이 난다.
너무 울어서 지하철 안 아주머니들이 다 걱정하며 어쩔줄 몰라하셨다.
아마 경찰 불러야 하는건 아닌가... 싶으셨을듯.
집에 도착해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부모님한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음날 학원에서 모든 재료들을 싸들고 왔다.
내 부모님은 내가 원하는 길을 막는 그런 부모님들은 아니었다.
그점에선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후련했다.
그리고 그날.
내가 선생님한테 선전포고라도 하듯이
관둔다고 말한날이
내 인생에서 일종의 마일드스톤이 되었다.
절대 잊지못할 날.
내가 알을 깨고 나온 날.
애기였을 때부터 나를 오랜기간 가르쳐주었던 미술선생님은
"왜 그 힘든길로 가니..." 하시면서도
내 그림들을 보시곤
"너는 너무 강해서 사람들이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하셨다.
그리고
"미술협회도 가입했니? 가입해라. 그리고 잘 버텨내야지..."
뉴욕 갤러리에서 전시
일단 그 길로 들어서자
무지막지하게 후련했던 기억이 난다.
어렴풋이 행복했었나? 싶기도
그냥 먹고 자고 그리고
먹고 자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와우! 였었던거 같다.
사건 사고도 꽤 많았었다.
돈 떼먹히고,
그림 떼먹히고,
연락하면 잠수타기 일쑤고,
물론 저런 사고들은 지금도 조심해야 한다.
계약서도 꼼꼼하게 읽어봐야 하고.
읽고 나서도 조심해야 한다.
여긴 정글이고
간절하고 절박한 예술가들은 손쉬운 먹잇감이다.
뉴욕에서 판매된 그림 값! 이건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보관만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빽도 없고 연줄도 없다.
그리고 누구 라인타서 알랑 거리는 짓도 못한다.
내 그림 사가는 사람들은
순전히 갤러리에서 내 그림 보고 사간 사람이다.
이 기쁨은 아무도 모름.
나만 알지.
나의 소중한 기쁨.
중간중간 소소하게 콜라보레이션도 했었다.
LG생활건강 더 레미디랑
자기네들 크림 1주년이라고 콜라보 진행.
지금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
중간중간 팔리기도 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고.
사기도 덜 당하고.
그래도 여전히 나는 고통스럽다.
변변한 스폰서도 없이.
알바와 지원금으로 생을 연명하면서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반 고흐에게 화풀이하면서,
작업대에 고흐 사진을 두고 욕하기도 하고 째려보기도 함 사람들은 고흐를 불쌍하게 여긴다.
생전에 그림도 못팔고 가난하게 생활하다 죽었다고.
나참, 어이가 없네?
고흐는 스폰서가 있었다.
태오라고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네?
물감도 사줘, 캔버스도 사줘,
노란집 방세도 내줘, 식비도 주고
그 대가는
"형은 열심히 그림 그려서 나에게 보내줘." 였다.
완전 짜증나!!!!!!!
물론 부족했겠지
빠듯하게 살아온거 나도 안다.
그래도 내가 처한 이 막막함을 어디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고흐 자화상을 쳐다보며 화풀이를 한다.
"그럼 오빠네 노란집으로 와. 여기서 같이 그리자. 태오에게 말해볼게, 태오도 사정이 빠듯하긴 하지만 잘 얘기해서 맞춰볼 수 있을거야. 재밌겠다! 같이 풍경 얘기도 하고!"
난 오빠들이 편하니까 그냥 오빠라고 생각하겠음.
그가 만약 나의 이런 저런 소리들을 들었다면 고흐는 분명 이랬겠지
천성이 따듯한 사람이니까.
가끔씩 인스타나 페북으로 메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저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조언 좀 해주세요."
와.......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대가 예술가로 태어났다면,
상황이 아무리 처참해도 작업을 하고 있겠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뭐 몇 년 작업하다
더 좋은게 나타나면 거기로 갈 것이고,
그저 내가 해줄말은,
"열심히 해보세요.
그림 그리는건 쉬워요.
사는게 어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