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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검 Jul 08. 2024

역사는 깨고 싶은 악몽입니다

율리시스 에피소드 2

Mr Deasy’s savingsbox & pocketbook, Stephen’s salary £3,12s (3 pounds 12 shillings)


1904년 6월 16일 오전 9:30

달키 Dalkey, 더블린


마텔로 타워에서 도보로 15분 거리, 달키에 위치한 사립 남학교.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로마군에 승리한 그리스 왕 피로스(Pyrrhus). 역사 수업 중 몰래 빵을 먹는 학생.

—암스트롱, 피로스에 대해 아는 것 있나?

—피로스, 선생님? 피로스, 피어(pier).

교실에 폭소가 터진다.

—피어가 뭔지 말해 볼래?

—피어는요 선생님, 바다에 나와 있는 것. 일종의 브리지(bridge).. 킹스타운 피어, 선생님.

다시 웃었다.


킹스타운 피어. 그래, 뻗다 만 브리지.. 내 실패의 상징. 아일랜드 도피 실패. (킹스타운 항구는 2년 전 대학을 졸업한 스티븐이 파리행 배를 탔던 곳이다. 지금은 돌아와 더블린에 살고 있지만.)


수업 중 딴청 부리는 아이들처럼 스티븐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데… ‘피로스가 아르고스에서 노파의 손에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줄리어스 시저가 칼에 찔려 죽지 않았더라면. 시간은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그들이 저버린 무한한 가능성의 방에 가둔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도 가능한 일이었을까? 일어난 일만이 가능했던 걸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학생들. 스티븐은 다른 책을 펼치며 톨벗에게 시구를 암송하게 하고 다시 사색에 잠긴다. ‘역사는 움직임이고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이 횡설수설 시구가 되어 생 제네비에브 도서관의 가라앉은 정적 속에 떠다녔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했던 밤들을 회상한다.


조이스의 우상,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그의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역사의 모든 순간은 다음 순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의 가능성만이 실제가 되고 그것이 일단 실제가 되면 그 순간의 다른 모든 가능성은 사라진다. 톨벗은 곁눈질로 훔쳐보며 암송하던 책을 가방 속에 밀어 넣는다.

—그게 끝인가?

—네, 선생님. 10시엔 하키(hockey)요, 선생님.

—반나절 수업이요, 선생님. 목요일이요.


학교장 가렛 디시의 집무실. 디시는 오디세이의 네스토르에 비유되는 인물이다. 그리스 필로스의 왕, 네스토르는 현명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며 말을 사랑하는 명기수였다. 디시도 말을 타는지는 모르지만 과거 챔피언 경마들의 초상이 그의 집무실 벽을 장식하고 있다. 헤이스팅 경의 리펄스,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샷오버, 1866년 파리 그랑프리, 보퍼트 공작의 실론. Cranly's arm. His arm. 소원해진 대학친구 크랜리가 스티븐의 의식에 들어온다. 벼락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며 진흙탕 첨벙이는 경마장에 데리고 가서 베팅할 경주마를 찾아 헤매던 친구의 모습이 유화처럼 그려진다.


디시는 스티븐에게 월급으로 3파운드 12실링을 정확히 세어주며 그가 바지 주머니에 돈을 욱여넣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타이르듯 돈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시인 셰익스피어도 돈을 모았고 영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빚지지 않은 것이라고. 디시는 웨스트 브리튼(아일랜드를 영국의 극서 지방으로 여기고 영국의 매너와 관습을 따르는 서영국인), 친영 연합주의자이다. 그는 3세대를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이라 자부하며 근대 아일랜드 역사를 되짚는다. 1790년대 아일랜드 반란, 1800년 영국 아일랜드 합병령, 19세기 상반기 다니엘 오코넬의 합병 폐지 운동, 184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 1860년대 페니안(Fenian, 독립주의) 혁명..


O'Connell Monument on O'Connell Street in Dublin 다니엘 오코넬(1775-1847) 아일랜드 정치인


패자가 지워진 승자의 환상. 디시의 역사는 부러진 파편들이다. 그의 공격적인 정치관은 왜곡된 기억과 편견으로 네스토르라는 정신적 아버지의 기대에서 여지없이 빗나가 버린다. 그는 이렇게 알고 있다. 1. 그의 조상, 존 블랙우드 경은 영국 아일랜드 합병에 찬성 투표했다. 2. 오렌지(친영) 당이 합병 폐지를 선동했다. 3. 골웨이 항구 계획을 망친 것은 리버풀의 음모였다. 4. 역사를 통틀어 여자들이 정치 운명을 망쳐놓았다. 지구에 죄를 가져온 이브, 트로이 10년 전쟁의 씨앗 헬렌, 이방인을 최초로 아일랜드 해안으로 끌어들인 더보길라(Dervorgilla), 아일랜드 독립주의 리더, 파넬을 잡아 내린 캐서린 오셰이. 스티븐은 보이지 않는 거부의 제스처를 취할 뿐이다.


영국인 친구 헤인즈의 영국사에 대한 유감 표명이란.. It seems history is to blame. 스티븐은 역사를 수동적이고 운명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이미 쓰인 시나리오가 두루마리 굴러가듯 짠하고 전개되는 결정론의 실체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화석이 된 사실들도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서 꿈틀대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스티븐은 역사의 본질을 묻는다. 저자 조이스는 여기서 역사를 기술이라 이름 짓는다. 주관적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 단련되는 아트. 상대를 고치기 위한 의도로 질문을 던지는 디시가 스티븐에게는 역사가 낳은 또 하나의 광대이다.


정의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준비가 된 돈키호테형 인간이랄까. 디시는 그의 작은 기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기기만으로 얻은 행복이 올곧은 불행보다 정신건강에는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기득권자로 살아오며 여전히 사회에 참여하고 젊은 세대와 지적 논쟁도 마다하지 않는 씩씩한 기성세대와 분노의 역사를, 신념 잃은 종교를, 예술가의 날개를 펼칠 수 없는 조국을 등지고픈 욕구불만 신세대의 충돌은 소리 없이 투명하게 분해된다. 주머니에 넣은 뭉칫돈. 탐욕과 비참함의 상징. 같은 방, 같은 시간, 같은 통찰 그리고 같은 나. 나를 옭아맨 올가미. 맘만 먹으면 언제든 끊어낼 수 있는 것.


디시는 자신이 쓴 편지를 스티븐이 친분 있는 언론사에 건네주길 부탁한다. 편지는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에 관한 것이다. 아일랜드에도 구제역이 발발하면 아일랜드 소에 수입금지령이 떨어져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이 될 터인데 농무부는 바다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제역은 치료가능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소 의사들이 정기적으로 접종 치료를 하는데 그들이 아일랜드에 오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이슈화하고 홍보하려는데 예상치 않은 난관과 음모에 봉착했고.. 그놈의 음모. 디시의 불똥은 갑자기 영국과 유대인으로 튄다. 영국은 유대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유대 상인들의 파괴공작에 늙은 영국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을 거역한 중죄를 지어서 오늘날까지 지구상에서 떠도는 신세라고 엄중한 어조를 낸다. 스티븐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죄짓지 않은 자 누구입니까? …. 저에게 역사는 깨어나고 싶은 악몽입니다.

그래, 아일랜드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역사는 악몽이지. 운동장에서 하키경기 중인 아이들의 외침소리가 들린다. 호루라기 소리: 골!

—모든 인류 역사는 하나의 위대한 목표, 즉 신의 현시(顯示)를 향해 가는 거라네.

스티븐은 창 쪽으로 엄지 손가락을 휙 움직이며 말했다.

—저게 신입니다.

만세! 아이! 위히이!!!

—뭐라고?

—거리의 외침소리요.


수긍이나 반박 없이 노인은 말을 잇는다.

—나는 자네보다 행복하다네. ….


Image from JoyceImages


—미스터 디덜러스!

가는 사람 붙들며 교장이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은.

—아일랜드는 유대인을 박해한 적이 없는 유일한 국가라네. 왠지 아나? 우린 유대인을 받아들인 적이 없거든. 하하하하하


껄껄거리며 양팔을 흔드는 승자 디시에게 신은 바로 응답한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태양이 그의 노련한 어깨 위에 던지는 반짝이는 동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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