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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J Aug 06. 2024

인생의 흐름, 기억 안에 담을 수 있다네

율리시스 에피소드 5


1904년 6월 16일 오전 9시 30분경

Westland Row, 더블린



멜번에 사는 피바토, 코완, 핀들레이는 모국을 나 몰라라 한다네. 무감각 냉담 무관심으로 태어나고 자란 호주를 벗어나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선 적이 없다니. 이탈리아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풍랑에 떠밀려 도착한 섬에서 연꽃 열매를 얻어먹고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어진 로터스 이터들(lotus eaters)처럼.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류이지. 모두가 그렇게 취해 살아가. 그렇게 흘러가. 이 섬의 건조함과 단순함과 느슨함에 취해 덩달아 영영 머물러야지.


카사블랑카. 허무. 몽환. 망각. 흐드러지게 많은지 아깝게 버려지는 장미들. 한없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 오렌지주스. 담배를 입에 문 아이의 뒷모습. 이방인의 방임. 내 말이 무슨 소용일까. 조그만 카페 안 뭔가에 취해있는 사람들. 삭발 염색한 젊은 여자. 초점 없는 눈빛. 분해되지 않는 담배 연기. 가라앉은 시간. 메디나 미로를 사는 아랍인들. 중독된 도시. 타임머신 여행자.


블룸은 아내 몰리의 불륜에 대한 상상을 떨쳐버리고자 아무 생각 대잔치에 돌입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은 듯. 내적 충격을 다루는 이 남자의 방식은 배회. 절망은 무의식에 찔러 넣고 물음표만이 의식 위에 떠도는데.



세상의 모든 책 읽기가 산들바람처럼 느껴질 때, 구구절절 독백마다 장문의 주석을 초대하며 블룸은 크레인이 늘어선 리피강 부둣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걷는다. 광고 아닌 백과사전을 파는 세일즈 맨처럼 간간히 땀을 닦으며. 우체국에서 자신의 필명 헨리 플라워 앞으로 온 펜팔 편지를 회수해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다 맥코이와 마주쳤다. 꼭 이럴 때. 치워야 할 인간. 대화 중 길 건너 여자에 눈길을 뺏겨 한 눈을 팔고 신문을 펼쳐 들고 광고에 다시 한 눈. 플럼트리 고기 통조림 없는 집은 어떤 집? 플럼트리와 함께하는 기쁨의 집~. 지 와이프도 가수라고 허세 떠는 맥코이. 같은 술수. 빌려가고 안 돌려주는 심보. 빌딩 벽의 맥주 광고 백화점 세일 광고 오늘의 극장 공연, 리아. 죽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히어로. 스스로 생을 마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말이 끄는 택시 스탠드를 지나며 코를 박고 식사 중인 말들에 동정한다. 거세당한 듯한 그들은 나름 평온해 보인다. 삶을 지탱할 양식과 잠들 곳이 보장되었기에 바보처럼 살아도 그만 아닐까.



웨스트랜드 로우 기차역 벽 안쪽에 멈춰 선다. 아무도 없지. 열어. 신문지 안에 편지를 펼쳐든다. 꽃. 납작해진 노란 꽃이 핀에 꽂혀있다. 향기 진 꽃을 떼어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꽃의 언어는 아무도 들을 수 없어 사람들이 선호하지. 헨리에게 … 짓궂은 헨리, 집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우리 언제 만나는데? 답장 미루면 혼내줄 거야. P.S. 와이프 향수 뭐 쓰는지 알려줄래? 알고 싶어. 뭐 이런 내용.. 진심인지 희롱인지 모를 온라인 플러팅 수준.



첫 편지보다 진보한 걸 보니 흐뭇하지만 그대와 만날 일은 없다오. 골치 아퍼. 아내와 하는 말다툼만 못해. 주머니 안에 든 핀을 내던지며 더블린의 두 창녀가 팔짱을 끼고 비를 맞으며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메리가 속옷 핀을 잃어버려서~. 메리와 마사 자매. 지친 여정 속 잠시 그들의 집에 들른 지저스, 음식을 대접하는 마사, 지저스를 바라보며 귀 기울이는 메리를 그린 어느 거장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28 by Jan Brueghel the Younger & Peter Paul Rubens @National Gallery of Ireland, Dublin


철도 다리 아래를 지나며 편지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서 버린다. 헨리 플라워 너는 같은 방법으로 백 파운드 수표를 찢어 버릴 수 있는 거지. 같은 종이니까. 기네스 맥주회사 아들은 백만 파운드 수표를 현금으로 찾았지. 백만 파운드를 만들려면 흑맥주 몇 배럴을 팔아야지? 기차가 머리 위로 요란하게 지나가고 머릿속에서는 배럴이 부딪친다. 벙홀이 열리고 거품의 꽃을 이루며 흐르는 액체의 소용돌이를 상상한다. 정신 나가게 마셔대는 더블린 인구.


세인트 앤드류 교회 뒷문에 도착. 헨리 플라워 이름 카드를 모자 가죽 밴드 안에 도로 집어넣는다. 교회문에 붙은 공고는 콘미 신부의 설교. 수백만 중국인을 구하라. 이교도 중국인들에 카톨릭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옆으로 드러누운 그들의 신, 붓다(더블린 국립 박물관에서 감상 추측). 뺨 아래 손을 받치고 세상 편한 포즈로. 향은 평화롭게 타오르는데. 가시관과 십자가와는 딴 세상일세.



세인트 패트릭의 세 잎 클로버. 그는 이교도 섬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광고 하나 파는 것도 이리 힘든데. 트리니티 트리오, 기막힌 아이디어네. 교회 뒷문으로 들어서자 미사가 진행 중이다. 머리를 조아린 여인들. 머리에 베일을 쓰고 손엔 검정 백. 어스름 해를 조명발 삼아 등장하는 펜팔 마사와의 미팅을 상상한다. 그녀는 여기서 기도 중인 여자 중 한 사람 일지도. 뒤로는 살짝 딴짓하며. 자기 성격대로. 이 교회 신자 제임스 케리가 했던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와중 살인을 계획하고(Phoenix Park Murders, Dublin, 6 May 1882) 결국엔 동지들을 배신해 죽게 만든 무적(The Invincibles)의 리더. 신앙심과 인격은 별개. 민족주의 아일랜드 독립 투쟁의 폭력성과 이중성. 근데 편지 봉투 찢었지? 그래 아까 다리 아래서.


포도주잔 헹굼물을 깔끔하게 들이켜는 사제. 빵조각만 나눠주고 포도주는 전시용인가. 신앙 사기. 하긴 교회를 펍으로 알고 와서 한잔 달라는 알콜중독자가 줄을 잇는다면. 환희에 찬 여신도. 일곱 번째 천국. 종교가 대중의 마약이라면 성찬례를 지켜보며 마취제를 경험하리. 더블린 사람들의 로터스(lotus), 포도주와 기네스 맥주. 발길 닿는 데마다 로터스 이터들이 보인다.



미사가 끝나고 일어서며 조끼 윗단추 두 개가 풀려있는 것을 보고 수습한다. 여자들은 이런 것을 즐기며 말도 안 해줘. 자기들한테는 말 안 해주면 화냄. 엉덩이라도 들춰진 것처럼. 열 한시 장례식까지 시간이 남아 약국에 들러 몰리에게 줄 페이스 로션을 조제하기로 한다. 스웨니 약국에서 가까운 휴고너(프랑스 신교도 이주민) 묘지는 언제 방문해야지. 허브 연고 소독제와 온종일 사는 늙은 약사의 멘탈은 어떻게 변했을까. 부작용. 로터스 이터. 로션을 주문하고 레몬 비누 하나를 사들고 나오는데 반탐 리옹이 나타나 신문 좀 보자며 땟물 낀 손으로. 에끼 너 가져라. 버리려고 했어. Throw away. 로터스 이터. 트리니티 파크 게이트에 사이클링 광고 포스터. 쯧, 제대로 된 광고가 없어. 크리켓 그라운드. 싸움꾼 아이리쉬는(Donnybrook 연중축제 폭력 다툼) 느려터진 크리켓 경기 같은 거 적성에 없지. 그늘아래 죽치고 앉아 오버 앤 오버, 아웃, 6 연타 맥 빠지는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로터스 이터들.



폭염. 지나가리. 끊임없이 변하는 인생의 흐름 순간에서 순간으로. 기억 안에서 멈춰 선 흐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네~. 오페라 Maritana 2막 돈 호세의 아리아 In Happy Moments Day by Day의 멜로디.



이제 목욕을 즐기자. 터키 바스 하맘. 모스크와 첨탑이 보이는. 깨끗한 물통. 쿨한 에나멜 코팅. 온화한 흐름. 부드럽게 녹은 비누향. 길게 누워 자궁 안의 태아처럼 욕조 위에 두둥실. 레몬노랑 배꼽 봉오리. 맥없이 떠있는 꽃. 로터스. 진흙 뿌리 위로 탄생한 영롱한 빛. 어둠을 뚫고 피어오른 영적 성취. 하나 된 육체와 영혼. 지저스의 성체. 디스 이즈 마이 바디.

무감각에서 깨어남으로 로터스의 이미지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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