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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차별

은희경 연작소설을 읽고

by 블루검

소설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온 세계 사람들이 모여사는 뉴욕은 몬타나나 미네소타 출신의 시골뜨기에게도, 같은 언어를 쓰는 영국인에게도 담이 높기는 매한가지 일 것이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으로 압도당하는 한국인을 포함한 타국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회적 문화적 이질감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외와 차별을 호소할런지도 모른다. 때론 같은 언어의 사투리가 외국어를 쓸 때 보다 껄끄러워지는 때가 있다.


뉴욕인들(미국인들) 자신은 어떨까. 멀티컬처럴리즘이 숙명인 그들에게 서로가 차별하고 차별받을지언정 기득권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 자신, 밀려드는 세계인들에 밀리지 않고 살아남고자 분투하고 적응해 나가기는 또한 매한가지일 터. 차별이라는 개념이 뉴욕이라는 무대에서 더 이상 키워드가 아닌 것이다.


소설에 깔린 차별적 인식이 껄끄러워지는 이유이다. 그것은 그곳의 분위기나 (차별이 은근슬쩍 분명한) 문화라기보다는 개별성에 가깝다고 보면 어떨까. 개인의 무지와 편견과 성향에 기인한 아름답지 못한 행위. 그러한 행위들을 한대 묶어 일반화하는 것은 안타까운 시선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불편한 심사를 표출하고 그런 상대를 기피하는 개인들의 치우친 (언제 바뀔지 모르는)세계관을 인종차별이라는 고착된 개념 안에 넣어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차별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오랜 관습처럼 다루려 한다면.


편견이 편견을 낳는 문화는 다민족 사회에서 지속될 수 없다. 적어도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세계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도시들이라면. 차별이 현현한 그곳은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에서 현주의 시선이 닿은 뉴욕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마마두나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최유정은 개별적이어서 아름다웠다. 그들 뉴요커들도 우리와 다를바 없이 나약하고 상처받곤 해서 몸을 웅크리고 뭔가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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