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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틱 빈센트

by 블루검

디지털 아트 갤러리, THE LUME에 다녀왔어요. 멜번인들의 협업으로 2021년 개시했다 작년 말 두 번째로 문을 연 반 고흐를 드디어 만났지요. 아로마 디퓨저, 바와 카페, 여러 개의 이젤이 놓인 아틀리에 등 다중 감각 도구를 투입한 전시는 스토리 텔링 방식으로 오감 체험을 통해 정서적 반응을 불러낸다는 모토였어요. 오리지널 작품 없이도 영사된 이미지와 아티스트 생애 각 시기에 맞춰 선택된 음악과 향기로 신선한 몰입감을 선사했어요. 색도와 색감의 변주가 극적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관람 중 사진으로 포착한 몇 작품들에 대해 위키피디아를 찾아 읽으며 몇 자 적어보았어요. 반 고흐의 편지글 등 인용문장은 볼드체로, 기념곡들은 퍼플로 표기해요. 너트맥, 카다멈, 사이프러스, 베티버, 레몬, 시더우드, 우디 어코드, 샌달우드, 앰버, 머스크 향이 나는 화가의 아틀리에와 작품 현장으로 입장합니다.


1885 뉘넌, 네덜란드

The Potato Eaters

첫눈에 반했고 지금까지 최애하는 작품이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이제 캐낸 감자 같은 흙빛을 입은 농부들의 비바람 탄 앙상한 손. 감자를 먹는 이 손으로 땅을 일구고 경작하고 수확했다. 등이 휘게 노동해서 정직하게 번 먹거리로 그들만의 멜랑콜리한 성찬이 시작된다.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두런두런 먹는 삶은 감자와 커피.. 한 접시의 감자가 주는 축복이 외려 삶의 버거움을 돌출한 뼈처럼 두드러지게 한다. 단일한 색감, 억압적 공간, 검은 실루엣 같은 인물들이 자아내는 아우라가 내겐 왜 매력적일까. 그것은 내 안에도 삶의 서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지난하게 살아온 인생이 고스란히 얼굴에 새겨진 어느 이국인을 마주하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 화가의 끝없는 습작처럼 인간이 빚는 노고는 단순히 빛이 나기에. 화가 자신 열린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선호했다고 한다. 너무 어둡고 세부적인 실수가 많다는 비평을 들어야 했다. 남이야 뭐라 하건 자신에게 이 작품은 최고였고 예상대로 미래 그의 걸작이 되었다. 에마뉘엘 샤브리에의 Idylle from Suite pastorale이 배경음악이 되었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사물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1887 파리

Trees and Undergrowth

파노라마로 이어지는 숲이 실제 작품과는 스케일이 다른 시각효과를 내지요. 플로어와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시현상을 일으켜요. 파리에서 고흐는 점묘법을 시도했어요. 이 삼림지가 좋은 예인데요, 작은 점들로 캔버스 전체를 완성해요. 결과는 나무들 사이 빛과 그림자의 경쾌한 움직임이지요. 너트맥과 샌달우드향이 나요. 멀리 들판의 햇빛도 수평선을 그리며 작품에 깊이를 더해요. 고흐는 자연에서 힘을 얻었죠. 세상사에 무감하게 되는 곳,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니까요. 슈베르트의 Moments musicaux, D780: III. Allegro moderato


1888 아를

The Poet: Eugène Boch

테오야, 난 화가 친구의 초상화를 그릴 생각이야. 그의 머리 뒤로 초라한 아파트의 밋밋한 벽을 그리는 대신 어떤 무한함을 불어넣을 거야. 깊은 블루,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블루로. 금발 머리와 블루 배경의 단순한 조합을 통해 신비한 효과를 낼 거거든. 푸른 하늘 가운데 하나의 별처럼. 그의 지독한 열정은 레드와 그린으로 표현할거고. 바흐/샤를 구노의 Ave Maria


1988 아를

The Yellow House

설퍼 태양, 코발트 하늘 아래 내가 사는 노란 집이 보이지. 땅조차 전부 노란색이야. 왼쪽에 나무로 그늘지고 그린 셔터를 단 집, 여기가 내가 매일 식사하는 레스토랑이지. 전에 그렸던 나잇 카페는 여기에 없어. 레스토랑 왼편에 있거든. 내 친구 밀리에는 이건 좀 심하다고 해. 평범한 식료품 가게나 멋진 구석 없는 그저 그런 집도 즐겁게 그릴 수 있다는 걸 그가 이해 못 한다고 해서 따로 설명할 필욘 없을 것 같고.. 졸라가 목로주점의 시작 부분에서 어떤 가로수길을 묘사했었고 플로베르는 부바르와 페퀴셰의 시작 부분에서 무더운 날씨에 빌레뜨의 강둑 한 구석을 묘사한 것이 기억나는데 이런 건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1888 아를

Starry Night Over the Rhône

윌, 나의 누이야, 난 별하늘이 무척 그리고 파. 밤엔 색이 훨씬 깊어. 잘 보면 어떤 별은 레몬옐로, 다른 별들은 핑크나 그린, 물망초 블루야. 청-블랙에 작은 흰 점들로 별하늘을 다 그릴 순 없지. 감청색 강물 위에 반사된 가스등의 강렬한 골드가 남록색 하늘밭 별꽃들과 앙상블을 이루며 밤은 연인들의 것이 돼요. 연인들은 달밤 강둑에 앉아 그림 그리는 웬 덥수룩한 화가를 응시하는 듯 하죠. 에릭 사티의 Gnossienne No.1


1988 아를

Café Terrace at Night

, 여기 블랙이 필요 없는 밤그림을 보렴. 아름다운 블루, 바이올렛, 그린만 있으면 돼. 이런 분위기에선 광장도 노랑나비색, 그린시트론색이 되지. 난 밤에 그리는 그림이 너무 좋아. 그린이 블루로, 핑크 라일락이 블루 라일락으로 보인다 해도 밤에 그리련다. 관람관 코너에 차려진 카페테라스에서 치즈를 곁들인 레드 한잔을 음미하며 칼 닐센의 목관 오중주 43 미뉴엣 2악장


1889 생레미

Self-Portrait

빈센트는 이 그림을 아트 딜러인 동생 테오에게 보내며 이렇게 썼어요. 그림을 한 동안 잘 들여다봐야 할 거야. 내 표정이 훨씬 평온해진 게 보이면 좋겠다. 비록 눈빛은 여전히 불안정한 모습이지만. 아니 나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압생트와 터키옥이 변주하는 소용돌이 패턴을 배경으로 수척하지만 강인하고 갈망하지만 타협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해요. 타는듯한 수염이 화가의 집념과 열정을 대변해 주는 듯해요. 그까짓 알콜 압생트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믿어요. 비발디의 The Four Seasons - Summer: III. Presto

빈센트는 10년 동안 약 36개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델료를 지불할 돈이 없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다고 해요. 자신을 탐구하듯 새로운 시도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거죠. 인생과 예술을 사랑했고 그가 사랑한 모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했을 거예요. 자화상은 그의 변화하는 스타일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의 성격과 정신 상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요.


1889 생레미

The Starry Night

Starry starry night ~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ey

싱어송 라이터 돈 맥클린의 노래, 빈센트, 첫 소절을 흥얼거려요.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지 못했지만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진실했어요. 그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 별이 빛나는 밤, 당신은 스스로 생을 접으려 했죠. 사랑받지 못한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었음을, 빈센트, 나는 말해 주고 싶어요. 시적인 내러티브로 무심한 세상에 건네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닿아요.


고흐가 동료화가 고갱과 의견대립으로 다투고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를 절단하는 사건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 후 그는 자발적으로 정신 병동에 입원하는데 왕성한 작품활동은 병동 안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침실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뷰를 스케치하고 완성한 많은 작품들 중 하나가 녹턴 시리즈의 마지막, 별이 빛나는 밤이다.


오늘 아침 해가 뜨기 훨씬 전 창문으로 마을 풍경을 보았어. 모닝 스타(비너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 그 별이 유독 커 보였어. 우주가 살아서 깜짝 쇼를 하는 것 같았다. 감정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밤+자연에 이런 언어를 할당할 수 있구나.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바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격정, 절망, 혼돈 또는 광기가 이런 식으로 표출된 걸까. 하버드 천문학자 찰스 휘트니는 천문학과 사후세계에서 영감을 얻은 고흐가 소용돌이 은하(Whirlpool Galaxy)를 그렸다고 했다. 또한 남프랑스에 부는 한랭한 겨울 북서풍일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정신병동 입원 후 그의 첫 발작을 야기한 것이 바로 이 바람이었다.


별들이 촘촘하다. 소용돌이 은하 좌우로 초승달과 비너스가 희고 노란 동심원 빛에 싸여 존재감을 드러낸다. 초승달의 따스한 오라와 임박한 여명에 마지막 빛을 발하는 비너스가 전하는 위로와 희망이 격정의 소용돌이 곁을 조용히 지킨다. 붓을 움켜쥔 화가에게 밤하늘은 더욱 역동적이고 무한해진다. 화가는 별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세상이 본 적 없는 밤하늘을 창조한다. 우주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만의 방식으로 그 자신 그림 속에 파묻혀 버린다.


근데 별들을 보면 항상 꿈을 꾸게 돼. 한 번은 테오에게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스스로 묻곤 해. 왜 창공의 빛점들은 프랑스 지도 위의 검은 점들보다 우리에게 접근성이 떨어질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는 것처럼 별에 닿으려면 죽음이라는 티켓이 필요하잖아.. 정녕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희망은 별에 있다, 라고 썼다가 바로 지적한다. 이 지구 역시 행성이고, 따라서 별인거지.. 화가에게 이 작품은 실패작이었다. 샤를카미유 생상스의 Danse macabre 리스트 편곡


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

Houses at Auvers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워. 무엇보다 이제는 보기 드문 오래된 초가지붕이 많아. 하지만 현대식 빌라와 중산층 시골 주택도 쓰러져가는 구식 초가만큼이나 아름다운 걸. 친구를 찍은 사진에 포착된 배경이 오베르의 집들이다. 푸른 기와집과 이웃 초가집의 배열이 흥미롭다. 결이 다른 친구가 있는 그대로를 포용하며 옆자리를 지켜주는 모습 같다. 그들의 다름이 두드러진다. 굴뚝도 지붕색도 외벽도 창문도. 6월 어느 날 1890년 파리 근교 오베르는 강풍과 먹구름으로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만 같다. 북부 전원의 대기를 호흡하며 고흐는 숨 가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마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듯.


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

Landscape at Auvers in the Rain

우르릉 쾅 뚝뚝.. 음향 효과가 쇼의 절정을 알린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캔버스에 수많은 균열을 낸다. 운명과도 같은 비는 피할 수도 없는 것. 밀밭도 마을도 새들도 화가도. 버어즈 아이 뷰(bird’s-eye view)를 찾아 화가는 언덕에 올라 이젤을 세웠고 비에 이젤이 젖을 수는 없으니 기억과 상상으로 비를 완성했으리라. 여러 개의 빗금을 풍경 속에 겹쳐놓는 형태로 떨어지는 비를 표현했다. 이미지를 관통하는 빗방울이 리드미컬하다. 이 기법은 일본 미술, 특히 우키요에(浮世絵 부세화)의 대가인 히로시게의 목판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내 모든 작품은 어느 정도 일본 미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1860년대부터 유럽에 유행한 일본 미술의 애호가였다. 그 시대 나라문을 굳게 닫고 있던 조선인의 미술은 안타깝게도 반 고흐와 접점을 만들지 못했다.


비 내리는 오베르의 풍경. 작품 제목이 밋밋해 부제를 달아보았다. 오흐브아 오베르(오베르여 안녕)이라고. 비와 외로움, 슬픔, 희망 같은 것을 캔버스에 남겨두고 화가는 3일 후 자살을 시도한다.


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

Wheatfield with Crows

구름 낀 하늘아래 바람 부는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떼와 그 사이로 난 길. 하늘이 위협적으로 변하고 바람의 기세에 드러누운 밀밭 위를 새된 소리로 우는 까마귀 떼가 무수히 날아든다. 블루그러데이션과 흙노랑의 콤비, 그린으로 강렬해지는 적빛만으로 화가 내면의 억눌린 슬픔과 고독이 유감없이 분출되었다. 삶이 끝나가는 느낌만은 아니다. 까마귀는 죽음과 함께 부활을 상징하는 새라고 한다. 그것은 아마 이제 새장을 나와 어디론가 비상하는 화가의 삶이기라도 한 듯.


이 극적인 그림이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일 거라는 추측은 빗나갔다. 그에게 위안이 되어준 오베르의 자연을 더 많은 화폭에 담으며 죽기 직전까지 예술혼을 불살랐다. 죽음은 그에게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아르보 패르트의 Fratres


전광판엔 그의 편지글들이 별처럼 쏟아져요. 그의 색에 매료된 것처럼 그의 언어에 사로잡혀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안 썼더라면 어쩔 뻔했어요. 우린 진정 몰랐을 거예요. 빨간 머리 고집스런 붓쟁이의 뛰는 심장과 설렘과 환희의 순간들을요. 땀과 자유로 범벅된 820통의 편지지가 마천루를 이루었네요. 메마른 세상이 순간 열정으로 빛나요. 레오 들리브의 Lakmé - Flower Duet


난 사랑 없인 살지 않을 거야.


그림에 컬러가 있듯 인생에는 열정이 있어.


난 30년 동안 이 지구를 걸어왔고,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념품을 남기고 싶어.

해바라기가 그의 꽃이 된 지도 135년이 흘렀어요. 고흐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가 전한 마지막 말처럼 슬픔은 영원할까요. 레몬 핑크 그린 블루 별이 된 그는 이제 평온하지 않을까요. 고흐만큼이나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창조력을 발휘하는 데서 오는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했어요. 그런 행복을 누리다 간 예술가를 단지 불행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을래요. 그는 삶과 너무 진한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짧지만 굵은 삶의 자취를 남기는 데 성공했어요. 힘겨운 투병 와중에도 필시 사후 대박을 꿈꿨을 거예요. 헨델의 Concerto grosso in G minor, Op. 6 No. 6: 1. Larghetto e affettu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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