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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검 Jul 21. 2022

미안하다 기억한다

Lucky Strike Filters

1월 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머물 때였다. 멜번에 있는 하우스메이트가 짤막한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돌아올 날이 가까워오자 좋은 날은 이제 끝났다고 운을 뗀 뒤 공항 면세점에서 만화책인지 하나를 사 오라는 내용이었다.


cartoon? 미국 거, 일본 거?

“미국 거” 그게 다였다. 이게 왜 로망인지 면세점에서 만화책을 파는지 캐묻지 않았다. 결국엔 까맣게 까먹고 생각 없이 면세점을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귀가했고 녀석도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 후 몇 해가 지나도록 그 부탁에 대해서 잊고 지냈다.


오늘 문득 그 만화책이 보고 싶어졌다. 만화인 것만 기억하지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 묵은 메일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메일이 자동 삭제되지 않았다. a carton of Lucky Strike Filters.. 생긴 거나 보자고 구글 이미지에 검색해 보았다. 만화는 안 보이고 담뱃갑만 즐비했다. 메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carton이었다. 콩떡같이 써 보내도 찰떡같이 해석한데도 유분수지 carton을 cartoon으로 한눈에 잘못 본 거였다. 그때 내게 carton이라는 단위가 익숙지 않았던 이유도 있으리라.


자다가 봉창을 뚫는 것도 아니고 달콤 짤막한 이메일에 누가 담배 따위 생각을 집어넣겠는가. 비누향 폴폴 풍기던 녀석은 만화와 더 맥락이 닿아있지 담배 한 보루쯤 상상을 했을까. 달링~에게 보내는 대화 같은 순진한 몇 줄을 농담처럼 일상처럼 흘려보낸 것이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이제야 조금 덜 미안했다. carton을 cartoon으로 읽은 사람이나 답장에 쓴 cartoon을 carton으로 묵인한 사람이나 피장파장인 것을. 일단 만화책보다는 담배가 덜 선물스러우니까. 한 보루 덜 핀다고 담배를 끊는 건 아니지만, 라이터를 숨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금연 시위였으니 담배 선물을 안 사간 것이 그리 매정한 일은 아닐 터. 단지 털털하기 그지없던 녀석이 담배 냄새는 안 흘리고 다녔다는 게 신기했고 나름 간절했을 그 럭키한 담배 맛을 선사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쉬웠다.


그가 보낸 옛 메일을 한번 들쳐준 덕분에 후회 한 줌은 덜은 기분이랄까. 상상 속의 만화책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을 읽을 수도 없어서 조금 김이 새긴 했지만.


하우스메이트로 사는 동안 녀석은 원래 성격인지 고의인지 내게 무슨 부탁이나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던하고 쿨한 척하다가도 생일 선물은 꼭 챙기려 들었다. 선물로 뭘 줄 거냐고 생일 한 달 전부터 아이처럼 귀찮게 했다. 그때 나는 이사 갈 준비를 하느라 바빠져서 그런 (사소한)일이 안중에 없던 날들이었다. 결국 선물은 없었고 혼자 아이처럼 울었을 녀석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선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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