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y Strike Filters
1월 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머물 때였다. 멜번에 있는 하우스메이트가 짤막한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돌아올 날이 가까워오자 좋은 날은 이제 끝났다고 운을 뗀 뒤 공항 면세점에서 만화책인지 하나를 사 오라는 내용이었다.
cartoon? 미국 거, 일본 거?
“미국 거” 그게 다였다. 이게 왜 로망인지 면세점에서 만화책을 파는지 캐묻지 않았다. 결국엔 까맣게 까먹고 생각 없이 면세점을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귀가했고 녀석도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 후 몇 해가 지나도록 그 부탁에 대해서 잊고 지냈다.
오늘 문득 그 만화책이 보고 싶어졌다. 만화인 것만 기억하지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 묵은 메일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메일이 자동 삭제되지 않았다. a carton of Lucky Strike Filters.. 생긴 거나 보자고 구글 이미지에 검색해 보았다. 만화는 안 보이고 담뱃갑만 즐비했다. 메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carton이었다. 콩떡같이 써 보내도 찰떡같이 해석한데도 유분수지 carton을 cartoon으로 한눈에 잘못 본 거였다. 그때 내게 carton이라는 단위가 익숙지 않았던 이유도 있으리라.
자다가 봉창을 뚫는 것도 아니고 달콤 짤막한 이메일에 누가 담배 따위 생각을 집어넣겠는가. 비누향 폴폴 풍기던 녀석은 만화와 더 맥락이 닿아있지 담배 한 보루쯤 상상을 했을까. 달링~에게 보내는 대화 같은 순진한 몇 줄을 농담처럼 일상처럼 흘려보낸 것이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이제야 조금 덜 미안했다. carton을 cartoon으로 읽은 사람이나 답장에 쓴 cartoon을 carton으로 묵인한 사람이나 피장파장인 것을. 일단 만화책보다는 담배가 덜 선물스러우니까. 한 보루 덜 핀다고 담배를 끊는 건 아니지만, 라이터를 숨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금연 시위였으니 담배 선물을 안 사간 것이 그리 매정한 일은 아닐 터. 단지 털털하기 그지없던 녀석이 담배 냄새는 안 흘리고 다녔다는 게 신기했고 나름 간절했을 그 럭키한 담배 맛을 선사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쉬웠다.
그가 보낸 옛 메일을 한번 들쳐준 덕분에 후회 한 줌은 덜은 기분이랄까. 상상 속의 만화책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을 읽을 수도 없어서 조금 김이 새긴 했지만.
하우스메이트로 사는 동안 녀석은 원래 성격인지 고의인지 내게 무슨 부탁이나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던하고 쿨한 척하다가도 생일 선물은 꼭 챙기려 들었다. 선물로 뭘 줄 거냐고 생일 한 달 전부터 아이처럼 귀찮게 했다. 그때 나는 이사 갈 준비를 하느라 바빠져서 그런 (사소한)일이 안중에 없던 날들이었다. 결국 선물은 없었고 혼자 아이처럼 울었을 녀석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선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