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차를 소유해도 버스를 탈 때가 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낯선 곳을 방문했다. 낯선 곳에 가선 그곳의 일상을 엿본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반복되는 시간, 우리가 아는 시간, 마비의 시간. 그런 시간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우선 버스와 만나는 보도가 좁다랗다. 사람들이 멈춰 섰고 어지러운 벽 위에 무언가 걸려있다. 인생이 낙서 같아도 시간표는 존재한다. 여기에 11번과 12번이 선다. 흐린 하늘과 피곤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무대가 있고 배우들이 서 있다. 낯선 곳의 일상에 전율한다. 내 안의 무엇이 깨어나는 것일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는 뮤어럴(벽화)의 도시이다. 투쟁이 일상이고 일상이 투쟁이었던 시간들을 거리의 뮤어럴이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90년대까지 정치적 동요로 티브이에서 특파원이 분쟁소식을 전해주던 곳이다. 1998년 자치정부 수립을 골자로 하는 평화 협정으로 분쟁은 종식되었다. 그 후 25년, 분쟁 없는 별거가 이어지나 보다. 아직도 긴장감이 감돌고 뮤어럴의 색채가 무겁게 느껴졌다. 벨파스트만이 줄 수 있는 분위기랄까. 그들은 떠나지 않았고 벨파스트인으로 남았다. 다행이었다. 전해만 듣던 곳을 이렇게 와서 볼 수 있다니.
벨파스트 시티에서 11번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Shankill Road가 나온다. 이곳은 프로테스탄트 노동자계층의 지역이다. 2023년 Shankill 지역은 거리에, 지붕 위에, 영국국기가 국경일처럼 게양되었고 찰스왕의 초상이 외벽에 붙었다. IRA (Irish Republican Army)에 맞서 무장한 UVF (Ulster Volunteer Force) 멤버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뮤어럴이 보인다.
이웃 동네에 위치한 Falls Road도 서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곳은 가톨릭으로 영국을 벗어나 통일 아일랜드를 염원한 역시 노동자계층의 거주지역이다.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저항운동을 주도한 인물들과 벨파스트 학살을 폭로하는 뮤어럴을 볼 수 있었다.
The Shankill & The Falls. 두 지역 사이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평화의 벽이 세워져 있다. 1969년부터 북아일랜드에 세워진 평화의 벽들 (Peace Walls)은 1998년 평화 협정 이후 더 높아지고 더 많아졌다고 한다. 이 벽들은 평화와 함께 분리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국인 아일랜드인 북아일랜드인 우리 모두는 형제라고 말하던 한 가게 주인장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도 설레게 하는 한마디였다.
영국의 지배는 12세기부터 1921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지난한 투쟁이 아일랜드의 역사가 되었다. 북아일랜드는 그 후로도 30년간 (1968-1998) 영국에서 벗어나자는 가톨릭 내셔널리스트와 영국에 속하자는 프로테스탄트 유니언이스트의 분쟁 (The Troubles)으로 얼룩졌다. 영국은 이를 종교 분쟁이라 했고 아일랜드는 이념 분쟁이라고 맞받았다. 수도 벨파스트는 그 중심이었고 특히 많은 사상자를 낸 북서부는 골목마다 컬러풀한 뮤어럴이 역사책을 대신할 정도이다. 폭동과 방화로 수만 명이 집을 잃고 타지로 이주하거나 국경을 넘어야 했다. Out of Belfast. 유럽 이민사에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세상에는 떠난 사람과 떠나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 뿐인지 모르겠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뿌리는 17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영제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들만을 북아일랜드에 이주시켜 가톨릭인 아일랜드 토착민의 토지를 압수 분배하는 식민지 정책을 폈다. 정착민과 토착민을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로 만든 이 정책은 토착민의 반발이 유독 심했던 북아일랜드에 집중되었고 이러한 박탈과 차별은 토착민의 적대심을 키워 수세기 동안 크고 작은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641년의 아일랜드 반란과 최근의 북아일랜드 분쟁을 들 수 있겠다. 다만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라는 현재 종교만으로 그들의 조상이 정착민이었는지 토착민이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왜 여기에 서 있을까. 북아일랜드 혼란의 30년은 한반도에서 내가 태어나고 젊은 날을 보낸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절은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집에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돌이켜보면, 지우고 다시 쓰고 싶은 낙서 같은 시간이기도 했다. 반공 방첩이라는 학교 외벽에 붙은 표어가 아직도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다. 20대에는 정신적 자유를 좇아 훌쩍 이민을 감행했다. 이민하기 전, 랭귀지 스쿨 시절엔 국제 뉴스를 시청하며 영어를 익혔다. 북아일랜드 사태는 그 당시 단골메뉴였고 Belfast, Sinn Fein, IRA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20세기 전후 벨파스트는 H&W로 대표되는 선박 산업과 기계화된 린넨 공장들로 세계적 수준의 붐타운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해군 함선등을 조달하는 요지로 독일군의 타겟이 되어 폭격을 받았다 (Belfast Blitz). 이후로도 30년 분쟁을 감내하며 가파른 20세기를 지나왔다. 더블린의 코널리역(제임스 코널리의 이름을 딴)에서 기차로 두 시간 남짓한 거리의 벨파스트. 문학의 도시 더블린과는 사뭇 다르게 터프하고 야성적인 이미지가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발자취 대신 꿈틀대는 야수의 상처 같은, 흉터로 남은 내 안의 야수 같은 뮤어럴이 등장한다. 거리에 꽃핀 뮤어럴처럼 시대를 반영하는 아티스트들의 활동도 풍성했으리라 가늠해 봤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인 제임스 코널리는 벨파스트에서도 영웅으로 건재했다. 저항 운동에 몸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의 이름은 불멸한다. 일제 치하의 안중근 의사가 한국사에서 그러했듯이. 벨파스트에서 노동조합원으로 일하던 마흔넷의 코널리는 [벨파스트의 린넨 노예들에게] 란 연설문에서 린넨 공장을 여성들에겐 도살장, 아이들에겐 교도소라 일컬었다. 이제는 깨어나 자본주의의 착취에 순응하지 말자는 외침이었다.
한편 제임스 조이스는 홀로 공장들을 둘러보고 벨파스트제 린넨 몇 장을 샀다. 스물일곱의 조이스가 시네마 극장자리를 물색할 겸 투자자와 함께 벨파스트를 방문했던 날이다. 작가와 혁명가의 행보가 사뭇 달랐다. 사회주의와 독립주의라는 공동선상에 섰지만 이후 조이스는 내셔널리스트의 강제성, 아이리쉬 정치의 폭력성과 가톨릭 교회와의 연계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Dear Dirty Dublin. 조이스는 20대 초반 아일랜드를 떠났다. 고향 더블린은 그의 모든 작품에 살아 숨 쉬지만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 정착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독립 후에도 영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유럽을 떠돌며 살았다. 조이스와 코널리, 이제는 나란히 아일랜드의 정체성이다.
벨파스트는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고향이기도 하다. 타이타닉을 생산한 회사, H & W의 크레인은 선박산업 전성기의 유물이자 도시의 상징으로 남았다. 3년이 걸린 타이타닉의 탄생은 수많은 선박 노동자에게 기적이자 자부심이었으리라. 역사 문외한인 내게 타이타닉은 그녀의 짧은 운명을 박물관 Titanic Belfast에서 드러내었다.
대재앙은 다각도로 분석되었다. 주원인은 베테랑 선장의 한밤의 질주였다. 빙산이 있다는 경고에도 속력을 유지했고 빙산을 망원경 없이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는 충돌을 면하기에 너무 근거리까지 와버렸다. 사고는 어이없이 일어나고 역사는 쓰인다. 수많은 목숨들이 아메리칸드림과 함께, 귀향의 설렘과 함께, 가라앉았다. 북 대서양 해저 가장 깊은 곳에 영원한 화석이 되었다. “빠르면 화요일 우리는 뉴욕에 도착한다.. “ 소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사라져 갔다.
Titanic Belfast는 1500명이 넘는 희생자의 이름을 해저 같은 까만 벽 위에 하얀 글자로 일일이 나열해 주었다. 배가 지어지는 과정부터 선체 내부, 클래스별 객실, 가구, 식사 메뉴등과 침몰 과정, 침몰 후 증언과 그 여파까지 그것은 거대한 스토리 텔러였다. 아홉 개의 Interactive Gallery는 실감 나고 멋진 박물관 내 여정을 선사했다. 전 세계 관광객이 찾아올 만큼 과연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흐린 날씨에 기분까지 가라앉을라 방문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래도 와보길 잘한 것 같았다.
벨파스트 7월의 밤은 짧았다. 밤 열 시가 되도록 훤했고 새벽 다섯 시면 날이 밝아있었다. 자연이 주는 예기치 않은 축복이었다. 넉넉한 하루에 비옷을 입고 구글맵을 손에 쥐면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이방인의 허기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걷다 보면 고향음식이 간절해지곤 했다. 나라별로 먹거리가 널린 내 도시와 비교하며 여기 사람들은 레스토랑보다 펍(pub)을 선호하는지 궁금했다. 도네갈 스퀘어에 도착하자 PIZZA라는 간판이 보였다. PIZZA는 벨파스트 시티 홀과 어깨를 마주하는 웅장한 건축물 Scottish Provident Building 1층에 들어앉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편견이 셌다. 피자보다 구찌가 어울리는 자리라며, 먹는 피자가 아닐 거라며, 멋쩍은 간판만 나무라며, 지나쳤다.
시티 홀이 보이진 않지만 꽤 근접한 거리에 테이크어웨이 피자집이 있었다. LITTLE ITALY 라는 작은 간판과 줄 서서 대기하는 풍경이 내가 아는 찐 피자집이었다. 집 근처 피자집에서 매주 한 번은 피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내 도시는 이탈리안이 너무나 많고 피자 파스타를 밥 먹듯 한다. 내게도 소울푸드가 된 걸까. 피자가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성분이라니. 고향음식이 고파도 한국 식당은 없을 것 같았고 있어도 왠지 멀 것 같았다. 아이리쉬 스튜나 감자요리는 원래 내게 매력이 없었다. 이튿날은 PIZZA에 들어가 보았다. 요리사가 밀가루 반죽을 주물럭대는 주방이 먼저 보였다. 이태리 풍경사진들로 꾸민 인테리어는 올리브 토마토소스향과 어우러져 이태리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은 이태리, PIZZA ON THE SQUARE는 고풍스러운 빅토리안 건축 외관과 그 자리 하나는 세계 최고였다. 구찌보다 피자인 게 다행이었다.
살면서 멈칫할 때가 있다. 나 라는 폐허를 느낄 때이다. 그것은 지나갔고 지금은 다르다고 믿곤 했다. 그러면 희망이 생겼다. 폐허 위에 무언가를 쌓고 얹었다. 벨파스트 시티는 시민과 관광객으로 적당히 활기찼다. 구름 하늘 아래 습기 먹은 대기가 상쾌했다. 가볍게 걸었다. 도네갈 스퀘어는 동서남북으로 시내버스 터미널이다. 어디든 여기에서 타고 나갔다 타고 돌아오면 되었다. 이층 버스를 타면 아이처럼 신나고 설렌다. 버스표를 손에 쥐고 계단을 뛰어올라 이층 맨 앞 좌석에 자리 잡는다. 시내가 시네마처럼 펼쳐진다. 시티 홀을 출발해 메이 스트리트를 지나고 라간강을 따라 어디론가 버스는 달린다. 미지의 벨파스트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