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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Jan 23. 2020

세상이 유지되는 이유

서로의 온기 때문이다

금요일이 되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할머니가 계신다. 3주 전에 요양원에 입소한 분이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양원에  입소한 어르신은 불만족스러운 일이 생겨도 솔직하게 표현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혹시 이 분도 어떤 요구사항을 요양원 측에 말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할머니에게 여쭤봤다.

- 할머니! 혹시 생활하시는데 무슨 불편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처음이라서 저희가 어르신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할머니는 그런 일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에게 들은 사정은 이랬다. 먼 거리에 있는 자녀들이 주말을 이용해서  찾아 것을 염려한  할머니가 절대 면회 오지 말 것을 자녀들에게 미리 전화로 엄포를 놓는다는 것이었다.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은 그리움을 가슴속에 숨기고 있다. 그 심정을 말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눈빛은 숨길 수가 없다. 할머니의 눈은 자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할머니의 입은 아니라고 한다. 이 할머니는 어떤 사연을 갖고 계신 걸까. 왜 자녀들에게 찾아오지 말라는 전화를 하는 걸까. 그러면서 그리움 가득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는 할머니의 마음이 나는 궁금했다. 나는 할머니 옆에 가만히 앉았다.




할머니의 고향은 원산이었다. 함경남도 남부의 영흥만에 위치한 항구도시, 해당화 피어나는 명사십리가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할머니는 엄마 등에 업혀 다섯 살 많은 오빠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어린 소녀의 나이는 7살이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친척 한 명 없는 곳에서 서로를 걱정하는 이는 서로 밖에 없었다. 똘똘 뭉쳐서 엄마를 도왔던 7살 소녀와 12살 소년은 어느새 자라서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다.

 

할머니에게는 젖먹이 아들 둘이, 그녀의 오빠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조카들의 나이는 할머니가 고향 원산을 떠나올 때의 나이와 비슷했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났지만 각자 가정을 이뤘고 엄마에게 물려받은 식당점점 손님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당시 22살이던 할머니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분주하게 장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급작스러운 오빠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군인이던 오빠가 훈련 도중 죽었다는 몇 줄의 짧은 전보였다.

할머니는 죽은 오빠보다 조카들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 올케언니가 두 아이들을 집에 두고 사라졌는데 그 아이들을 내 품에 안았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래야 했고.


성실하기만 했던 할머니의 남편은 조카들이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밖으로 나돌기만 했다. 그는 남의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고 했고 할머니는 이미 그 아이들은 내 자식이라고 선언했다.

일 년쯤 지나자 그는 아예 집을 나간 후 발길을 뚝 끊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그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는데 이미 아이까지 낳은 상황이었다. 그는 할머니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할머니는 군소리 없이 결혼생활을 끝내는 일에 동의해주었다.


할머니는 네 명의 아이를 책임지고 엄마까지 모셔야 했다.

그녀는 30년 동안 장사를 했다고 한다. 곰탕집이었다. 할머니는 다섯 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 했는데 식당에서 가장 빨리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네 아이들과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할머니는 잠깐도 쉴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그녀를 보며 그리 몸을 혹사시키면 말년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라며 걱정을 했는데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할머니의 두 무릎이 부서진 것이다. 다시는 걸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은 휘었고 기억이 흐려져갔다.

급기야 할머니는 스스로 요양원에 입소하겠다고 선언했다.




자녀들이 먼저였던 사람, 아이들을 지켜내야만 했던 사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 병들어서 걷지도 못하는 내가, 남한테 가랑이를 벌리고 뒤처리를 부탁해야 하는 모습을 어찌 아이들에게 보일 수 있을까.


요양원에 입소한 이후에도 웬만한 건 부탁을 하지 않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소변은 기저귀를, 큰 볼 일은 변기를 사용했는데 혼자 휠체어에서 변기로 이동해보려다가 바닥에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누군가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하면 극구 사양하는 분이었다.


- 어르신과 제가 그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어르신들께서 그 힘든 시절을 견뎌주셔서 우리가 있는 걸요. 어린 우리를 보살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젊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미안하다는 생각은 갖지 마세요. 이제 우리가 보살펴드릴 차례이니까요. 제가 더 늙어서 병이 들면 또 다른 젊은이가 저를 지켜줄 테죠. 그래야 이 세상이 유지될 게 아니겠어요?

이제 자녀분들께도 기회를 주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어르신을 보살필 수 있는 기회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자녀분들의 마음이 많이 아플 거예요. 요양원에 모신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 아파하고 있을 테니요.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손을 잡아야 한다. 체온은 말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낼 때가 많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그저 손을 맞잡고만 있었다.




다음 금요일이 되었을 때 지난 금요일처럼 전화기를 들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 주말인데 바쁘지 않음 다녀가거라. 손자들이 보고 싶구나.


나는 할머니의 부서진 두 무릎에 감사드린다. 툭툭 튀어나온 손가락 관절에 감사드리고 빠져버린 손톱에 나는 감사드린다.

나는 어르신들이, 가난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 분명한 그 시절을 이 악물고 우리를 앞서 살아내신 것에 고개를 숙인다.


나 역시 늙어서 병이 들 수 있는데, 나는 세상이 멈추지 않고 돌고 돌 것임을 믿는다.



토요일에 할머니는 외출을 다녀오셨다. 스무 명이 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서.

할머니 침대 위에 놓인 여러 개의 사탕 봉지에서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아직 하나도 개봉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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