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욱 Mar 13. 2023

스파시보

5층 아파트보다 긴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던 DX530LC-5L(굴착기)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동시에 일하던 인부들이 한 곳을 향한다. 그때 가슴 언저리 주머니에 넣어둔 무전기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들린다.

"가베 한번 당겨보겠습니다."

느긋한 저쪽과는 달리 이쪽은 입이 마른다.

"띠리리릭, 인도쪽 상황은요?"

4M 방음벽 밖에서 신호수가 대답한다.

"띠리리릭, 차량 지나갑니다. 1분 만이요."

굴착기 장비기사의 덤덤한 답변이 이어진다.

"안전하면 알려주세요오~"


도로와 접한 외벽, 그것도 최상층을 해체할 때는 초긴장 상태가 된다. 압력으로 가위질을 하는 일명, 회전형 크라샤(Chusher)로 외벽 콘크리트가 안쪽으로 쏟아지도록 미리 작업을 해놓고, 가설비계라는 철파이프를 두줄이나 설치했으며, 비계파이프에 항공마대라는 질긴 천을 고정시켜 작은 돌멩이 하나도 외부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해두었지만, 불안한 맘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바깥에서 동태를 살피는 신호수에게 연락이 온다.

"띠리리릭, 작업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한번 당겨보겠습니다."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나누는 상황에서 믿을 거라고는 손에 잡은 무전기뿐이다.


위잉, 무던한 장비기사의 목소리와는 달리 데몰리션(530 굴착기의 다른 이름)의 긴팔이 떨린다. 저 63 TON의 육중한 녀석이 떨고 있을 리는 없고 덜덜거리는 건 내쪽일 것이다.

붐대 끝에 매단, 개구리 왕눈이에 출현했던 심술궂은 가재의 집게발처럼 생긴, 크라샤가 손목을 접듯이 붐대 끝에서 직각으로 꺾인다. 그러고는 외벽 뒤쪽과 가설비계사이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손끝을 집어넣는다. 지켜보는 근로자들 모두 입은 반쯤 벌리고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침묵한다.


쿠우우웅~ 굴착기에서 아까와는 다른 큰 소리가 난다. 녀석이 커다란 집게를 바깥쪽 벽면에 붙이고 안쪽으로 당기는 중이다. 쿠아아앙~ 굴착기가 마지막 힘을 쓴다. 외벽 끝이 안쪽으로 기울어진다. 완전하게 넘어오진 않았다. 군용 전차에서나 보았던 굴착기 무한궤도가 들썩인다. 우르르르릉, 30년을 끄떡없이 버텼던 벽이 마지막 일갈을 내지르며 넘어진다. 뿌연 먼지가 화악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동시에 굴착기가 삐삐삐삐 경고를 하며 급하게 물러난다. 굴착기에 연결된 물호스를 잡고 있던 살수공도 재빨리 호스를 당긴다. 그 옆에서 비산먼지 때문에 물을 뿌리고 있던 근로자가 허공에 지그재그로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작은 물알갱이가 사방으로 퍼지고 먼지가 사그라들 때쯤 물방울들 속에서 선명한 무지개가 나타난다. 늘 예상하지 못한 선물은 두배로 기쁜 법. 참고로 내일은 화이트 데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장비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넘어왔습니다. 이제 안쪽 작업할 테니 바깥은 통제 안 해도 됩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던 근로자들이 그제야 각자 일을 시작한다.


데몰리션이 고층건물 해체 전문가라면 텐이라는 작은 굴착기는 바닥정리 전문가다. 콘크리트덩어리를 잘게 부수고 그 속에 있는 철근을 빼낸 후 이 철근을 동그랗게 혹은 네모나게 만드다. 1 TON가량의 고철 덩어리다. 이 작업을 고철말이라고 한다. 이때 사용하는 부속의 명칭이 고정형 크랴샤(Chusher)인데, 현장에서는 멍텅구리 크라샤 혹은 하마라고도 부른다. 이 녀석이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면서 콘크리트 깨는 걸 보면 과연 하마라는 명칭이 제일 어울리는 듯싶다.



요즘 들어 뭔가 얘기를 할 때 뜸을 들이는 버릇이 생겼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첫 문장으로 독자를 반하게 하지는 못할 망정 구구절절 뜸을 들이다 보니 독자들이 몇 줄 읽고는 빠른 스크롤로 쭈욱 내리고는 미련 없이 떠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밥맛을 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뜸이 필요한 법이니 이 뜸 들이는 수고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철거현장은 여러 공정의 근로자가 함께 한다. 근래에는 그중 고철팀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철거현장에서 나오는 모든 철을 수집한다. 굴착기가 고철말이로 만들어준 고철뭉치를 파는 것은 기본이고 콘크리트 덩어리를 부술 때 떨어져 나온 고철 동가리를 줍기도 한다.

특히 이 철거현장이란 곳이 평지가 아니고 해체 잔해물이 울퉁불퉁 쌓여있기 때문에 그들의 하루를 지켜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 내가 다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네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현장을 돌아다니며 팔 하나 길이의 철근부터 손바닥만 한 철근 조각을 줍는다.

그들이 양손에 철근 자투리를 잡고 콘크리트 덩어리가 만든 산을 오르내리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찮아 보이기까지 한 고철 쪼가리를 양손에 잡아들고 한쪽에 세워둔 낡은 트럭 짐칸에 차곡차곡 모으는데, 언제 저걸 가득 채우나 하는 생각과는 달리 오후 세네 시가 되면 1톤 트럭 짐칸이 가득할 정도로 쌓인다.

가끔 저네들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심 봤다"라고 외치는 때가 있다. 동파이프를 주운 것이다. 1kg 고철이 470원인데 동은 10,000원을 훌쩍 넘으니 과연 산삼을 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신이 감춰둔 심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바로 우리 옆 멀지 않은 곳에.

고철을 모으는 그들을 보면서 작가가 온갖 단어를 모아서 문장을 완성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들에게는 고철 조각으로 가득한 저 낡은 트럭이 밤을 지새워 쓴 문장이고 삶을 담은 한 권의 책이 아니겠는가.


고철팀은 고철 매입계약을 한 사장과 작업반장, 그리고 러시아인 네 명이다. 서류를 보니 러시아인 네 명은 모두 F-4 비자로 입국했다. 러시아 국적의 사람과는 첫 만남이다. F-4 비자는 재외동포 비자이다. 부모나 조부모 한쪽이 한국인이었다는 뜻. 나와 같은 조선의 피가 그들에게도 흐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러시아 청년들 네 명은 모두 현장등록을 했지만, 한꺼번에 출근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은 두 명이 나온다. 그럴 때면 두 명은 다른 현장에 간다고 한다. 다들 한국에 온 지  2년이 넘어서 대충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이름을 물었다. 두멘, 바짐, 바이르, 코스탄틴. 호기롭게 물었지만, 볼 때마다 이름과 얼굴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선천적인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심하다. 더욱이 안전모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조선의 혈액을 물려받았다고는 하지만 러시아 국적을 가진 외국인을 눈만 보고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어쨌거나 노력은 해봐야지. 다 큰 청년들을 어이, 저기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외모적인 특징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모니터 앞에 붙여두었다.

바짐 - 키 크고 잘 웃음, 두멘 - 좀 작고 얼굴 통통, 바이르 - 생선을 전혀 먹지 못함, 코스탄틴 - 마르고 키가 큼.


손에 철근 조각을 쥔 두멘을 발견했다.

"두멘, 쉬엄쉬엄해요."

녀석이 웃는다.

"두멘 아냐, 헤헤"

"아! 쏘리 바짐."

잠시 뒤 바짐과 만난다.

"바짐, 물 좀 마시고 해요."

녀석도 웃는다.

"바짐 아냐, 헤헤"

"아! 쏘리 두멘."

벌써 한 달 넘게 현장에 출근하는 청년들인데, 아! 내게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국청년들도 나이구분을 못 하는 눈치인데 외국청년들은 오죽하랴. 청년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네 명 중 셋은 결혼해서 자녀들도 있다고 한다.

"아홉 살짜리 딸이면 많이 보고 싶겠네요. 두멘은 러시아 언제 가요?"

"러시아 안 가요. 못 가요."

"지금 전쟁해서 못 가요."

"우리 전부 러시아 안 가요."

매일 뉴스를 보면서도 실감이 안 났는데, 이 러시아 청년들의 촉촉한 눈동자가 그들의 나라가 진짜 전쟁 중인 것을 알게 한다.


드디어 이들이 한 조각 두 조각 모은 철근 동가리들이 1톤 포터 짐칸에 가득 모인다. 1톤에서 조금 모자랄 거라고 한다. 고철 1KG 시세가 470원, 하루종일 셋이 모은 잡고철이 45만 원 정도 된다. 고철팀의 주수입원은 고철말이로  만든 철근 덩어리고 잡고철은 부수입이다.

"아니 그 작은 조각들을 모아 오십만 원 돈을 번다고요. 철근 하나씩 줍는다고 우습게 봤는데, 오 괜찮구먼."

"헤헤 그래야 얘들 일당 주고 밥도 먹고 그렇죠."

고철팀 작업반장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한국사람인 반장이 더 외국인 같다.


짐칸에 파란 천을 덮고 현장을 나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멘, 바짐. 수고했어요. 내일 봅시다."

두멘인지 확실하지 않은 두멘이 꾸벅 인사를 한다.

"스파시보"

"엥 뭐라고?"

"스파시보, 스파시보"

"스? 파? 시? 보?"

바짐인지 확실하지 않은 바짐도 인사를 한다.

"스파시보"

스파시보는 고맙다란 뜻이라고 한다. '고맙기는,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와서 일해주는 너희들이 더 고맙지.'


사무실에 들러 서류를 정리하다가 안 사실,

오늘 출근한 청년들은 바이르와 코스탄틴이었다. 휴, 모니터 앞에 청년들의 사진을 붙여두어야 할까.

그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앞으로도 이름과 얼굴은 자주 헷갈리겠지만, 청년들이 알려준 단어는 잊지 않을 듯싶다. 그리고 자주 사용할 생각이다.


러시아 청년들아~

나도  '스파시보'

독자들에게도 스파시보!  

  

       

매거진의 이전글 글이 부르는 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