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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샘 Sep 10. 2023

멍때림의 미학

오랜 직장 생활로 인해 주말이나 방학 중에도 어김없이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이 떠짐을 감사해야 하는 건지. 누군가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퇴직하고 싶다 하던데. 토요일에 온 가족이 여유로운 늦잠을 즐기는 동안, 나홀로 침대 위에서 뒹구는 아침 시간이 나는 아깝다. 이건 분명히 심각한 중증의 직업병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그 새벽을 홀로 누리려고 했다. 가족들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으로.


아지트 1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연트럴파크라고도 부르는 작은 숲길이 조성된 곳이다. 집 밖으로 10m 정도만 나서면 예전의 기찻길 위에 길게 조성된 숲길을 걸을 수 있다. 출근하는 날에는 이른 새벽에 그 길을 걷거나 뛰거나 그 길로 출근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하였었다. 남이 가진 것만 부러워하는 찌질한 인간. 자신이 가진 것은 너무 작아 보이고.

그래서 움직였다. 주말에라도 그 시간과 공간을 누려보자고. 아이패드를 들고 숲길에 인접한 카페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호사를 누려보자 생각하면서. 새벽 공기와 초록초록을 느끼기위해 카페를 찾았으나 그 시간에 오픈 한 곳은 편의점뿐이고, 딱 한 집이 아직 영업 전 이기는 하지만 문은 개방된 상태로 작은 마당에 파라솔과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이전의 주택을 개조한 카페이기에 작은 마당이 그대로 있었다. 염치 불고하고 난 그 자리에 앉아서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택시에서 한 젊은 여자가 내리더니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이 집의 주인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죄송한 마음에 일어나서 얼른 사과하면서 혹시 커피 한잔할 수 있냐는 말과 함께 집이 너무 예뻐서 잠깐 앉아있었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그 젊은 주인장은 커피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고 그냥 앉았다가 가라고 통 큰 허락을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날 새벽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분께는 다음에 커피 마시러 꼭 다시 오겠노라 하면서 장기적인 사용에 대한 허락도 받았다. 그렇게 나의 아지트 1이 만들어졌다.


며칠 뒤 퇴근 후에 그분과의 약속을 지킬 겸 친구와 그 카페에 들렀다. 그때의 맘 넓은 여자는 없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친구와 바깥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일상을 나누었다. 그때 한 젊은 남녀가 차를 마시러 올라가다가 갑자기 나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아들과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를 함께 한 아들의 절친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엄청나게 자주 드나들던 친구로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군 복무 중인데 다음 달에 전역이고 마지막 휴가를 나온 거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근데~~~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친구라더니. 나와 지금 차를 마시고 있는 그 친구의 아들이 지난달 의무관으로 배치받은 그 부대라니. 한 명은 ROTC 장교로, 한 명은 군의관으로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사이라니. 또 하나 저 계산대에 있는 젊은 청년과 자신과 그리고 우리 아들이 매우 친한 친구라고. 갑자기 그 청년까지 내려와서 어릴 때 우리 집에 많이 놀러 갔었노라고. 가서 게임 많이 하고 놀았노라고. 이름을 들으니 나도 기억이 스멀스멀 나는 이름이었다. 외모는 변했어도~~~ 

우리는 한동안 아들이 빠진 아들의 근황 토크를 나누면서 추억에 잠겼었다. 세상은 정말 좁다는 것을,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이웃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시간이었다. 우리 옆에 있는 작은 소자가 예수님일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눈길 한 번, 손길 하나 조심스레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지트 2

누구나 때가 되면 퇴직 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만 많을 뿐 구체적인 실천에 옮긴 것은 아직 하나도 없는 듯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청난 그림을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날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밑그림은 서울 근교에 조그마한 집에서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나의 작은 로망인 듯하다. 그래서 남편과 잠깐이라도 그런 곳에서 살아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는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다. 얼마 전에 아지트 1을 발견하고, 점점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좋은 장소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내가 사는 곳이 고향이고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점점 나를 사로잡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인왕산 자락에 있는 책방. 이름도 초소 책방. 과거의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듯이 과거의 초소를 개량해서 이른바 북카페로 변신한 책방이 있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좋은 북카페가 있다니 너무 놀라웠다. 특히 우리 집에서는 차로는 불과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새벽을 깨우고 눈 비비고 일어나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가서 초록초록을 누릴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못 쓰는 글도 써보고, 글씨도 써보고, 그림도 끄적끄적해보고~~~


드디어 입성~~~ 몸이 알람.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이 인왕산 자락에 포옥 안긴 북카페에 나의 둥지를 틀었다. 오오~ 5월의 새벽공기는 신선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날씨네~~ 부지런한 사람들이 꽤 많네. 내 눈에는 새벽예배 마치고 오신 듯한 어르신들. (내가 그 어르신들 나이일 텐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친구들과 오손도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모두 모두 행복한 얼굴들이다. 옆에 앉아있는 모녀간의 대화를 옆에서 딸이 듣고는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아빠 같은 남편을 만나서 좋겠다“ “엄마도 그래?” 글쎄??? 같이 눈 마주치면서 웃었다. 이심전심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마음이 진짜, 마음이 가는 대로 그것이 진짜~~~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맘껏 웃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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