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 온 지 벌써 6일째다.
어떤 여행객들은 벌써 발리에서 최소 세 지역은 훑고 지나갔을 법한 시간이다.
발리 여행 전에는 수시로 들락날락하던 발리여행 카페도 요즘은 시들하다.
대부분의 글들이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많은 글들이 “일정 좀 봐주세요. “이거나 ”일정 좀 추천해 주세요. “라고 간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한량일 뿐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을 리 만무하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걸 여기 와서 실감하고 있다.
아이는 매일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쉽다고 한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둥둥 떠다니고 있다.
아이는 학교에 빠르게 적응했고
아이가 없는 시간 동안 나에게 중요한 일은
나의 배고픔을 달래는 것뿐이다.
숙소에서 그랩으로 배달을 시켜 먹었는데
너무 실망스러워서
점심때는 숙소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11시쯤 그랩을 불러 최근에 사누르에 생긴
아이콘발리로 향한다.
사실 목적지는 따로 있다.
깨끗하고 시원한 신상 화장실을 들린 후
바로 건물 뒤편으로 연결된 해변으로 간다.
해변가를 걷다가 발견한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 라테 한잔을 마시며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을
멍하니 감상한다.
바다 한 번 봤다가 지나가는 사람도 한 번 봐주고
같은 공간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흘낏 쳐다본다.
그러다 심심하면 휴대폰을 들고 사진도 찍고
이 모든 호사를 누리게 해 준 남편에게
인증샷과 함께 감사 인사도 잊지 않고 보낸다.
그래도 심심하면 한국에서 육아와 맞벌이로 사투 중인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며 염장질을 한다.
20년 가까이 만난 착한 내 친구들은
고맙게도 틈틈이 내 말동무가 되어준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이제 점심을 먹을 차례다.
밥 몇 숟갈 뜨고, 아까 했던 행동들을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밥을 먹는다.
항상 10분이면 식사를 끝냈는데
이곳에선 한 시간 동안 밥 숟가락을 들고 있다.
밥 먹다가 문득 생각나는 걸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본다
지금도 시원한 라테를 마시며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이런 여행도 있다고, 끄적이는 중이다.
점심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면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가 몸을 적신 후
바로 나온다.
선베드에 냅다 드러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햇볕은 쨍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가끔 벨라가 밥 먹으러 오면
미야옹 미야옹 벨라를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다시 드러누워 아름다운 정원을 멍하니 쳐다본다.
숙소에는 프랑스인 커플이 있는데
우리가 오기 전부터 여기 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나보다도 더 심플한 시간을 보낸다.
항상 숙소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다.
그게 아니면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책을 읽는다.
그들을 보니 문득 나도 책이 읽고 싶어졌다.
내 휴대폰에는 밀리의 서재가 깔려 있지만
역시 이런 감성에는 종이책이 딱이다.
1월에 친구와 답사를 핑계로 발리에 왔을 때
종이책을 들고 간다는 친구 따라
인천공항 서점에서 책을 한 권 구매했다.
노란색 표지가 참 예뻐 보였던 ‘스토너.’
친구도 나도 결국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왔다.
반년 넘게 거실 책장에 장식품처럼 놓여있는
그 책이 비로소 떠올랐다.
님편에게 다음 달 발리 들어올 때 가져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정말 오랜만이다.
사실 내 기억에는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조차 없는 아주 어릴 적에나 가능했을 법한 일이다
여전히 아이 등교 준비를 시키고
아이가 돌아오면서부터는
한국에서와 비슷한 일상이 펼쳐지지만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주어진다.
그게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