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하 in Sanur
사누르(Sanur)는 발리 내에서 호주 노인들이 휴양차 많이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두 달 가까이 지내보니, 젊은 여행자들 보다는 연세가 있으신 분 들이거나 가족 단위로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럴만한 게 이곳에는 짱구(Canggu)나 세미냑 (Seminyak)처럼 힙하고 멋진 가게나 식당, 비치 클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리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우붓(Unud)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하거나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만한 곳도 없다. 하물며, 바다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나와 아이는 사누르에서 단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 아이는 모래가 발에 묻는 게 싫어서 안 들어간다고 하지만, 작년에 하와이, 그리고 올해 초 보라카이에 갔을 때는 모래가 묻든 말든 물개처럼 바다로 뛰어들어 가곤 했다. 나도 그랬다. 하와이에서도 보라카이에서도 해변 앞에만 가면, 마치 바다가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이래도 안 들어올 거야?”
뜨거운 태양아래 부서지는 푸른 바다의 청량한 파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아름다운 바다 앞에서 수영복에 모래가 들어갈까 봐 망설이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누르의 해변은 나와 아들을 무장해제 시키지 못했다. 빨간 비키니를 입고 해수욕을 즐기는, 한 아이의 엄마를 동경하긴 했지만 그 바다 앞에 설 때마다 멈칫했다. 그냥 수영장이나 가자며 발길을 돌렸다.
여행 후기 중에 간혹 사누르가 너무 심심하고 지겨워서 예정보다 일찍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글이 있었다. 반대로 누군가는 번잡한 우붓이나 짱구에 있다가 사누르에 오니 한적해서 좋고 제대로 쉬는 것 같다고 했다. 바로 여기에 힙한 장소도 아름다운 바다도 없는 사누르에서 살아남는 생존 포인트가 있다.
‘jalan-jalan(잘란 잘란)‘
산책하다, 거닐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
보통 여가를 위해 산책하거나 특별한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내가 두 달 동안 한 일이라곤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것뿐이다. 물론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목표가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오늘 뭘 먹을지를 고르는 일!
대부분 ‘오늘은 뭐 먹지?’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를 썼다. 그리고 빈 둥 빈 둥 걸었다.
사누르에서 오랜 기간 생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상태, 즉 무료함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느긋함이다.
이런 상태로 있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일단,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운이 좋으면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러쿵저러쿵 이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아이 도자기 체험을 갔다가 프랑스인 부녀를 만났다. 발리에는 제대로 된 치즈와 와인이 없어 괴롭다던 그 프랑스인이 외쳤다.
“알아, 나 프랑스인이야!”
지난달에 독일 커플들이 신나게 콧대 높은 프랑스인을 흉보던 게 생각나면서, 그의 외마디 외침에 웃음이 났다. 프랑스인들 스스로도 어떤 평판을 얻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의 직업이 소믈리에라고 밝힌, 그 보르도 출신의 프랑스인은 발리에 와인을 수입하려다 그만둔 썰도 들려주었다. 발리에 와인을 들여오는 집안이 있는데 거대한 마피아 조직 같아서 섣불리 손대면 다친다고 지인이 말렸다고 한다. 이런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금, 이곳이 아니면 어디서 또 들을 수가 있을까?
또한, 내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가 수영 강습을 받거나 체조 수업에 참여할 때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이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지난 시간에 비해 아이가 무엇을 더 잘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거나 아이가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습하는 모습에 대해 칭찬해 주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아이 안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꾸준한 노력의 가치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듯싶다. 학교에 가도 모두 자기보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 뿐이고, 체조 수업에서도 아이가 제일 못한다. 그런데도 아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학교 가는 것도, 체조 수업에 가는 것도 즐거워한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만의 성취를 조금씩 이루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사누르에서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나라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게 가능하다. SNS에 근사하게 올릴만한 게 없어서다. ”잘 지내? “라는 물음에 멋진 사진을 촤르륵 올리며 자랑할만한 게 없는 곳이다. 어쩌면 “그냥 별일 없이 지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싶다. 그럴 거면 왜 여행을 가지? 싶을 수도 있지만 남들이 누리는 보통의 나날을 꿈꿔봤던 사람들은 안다.‘별일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이루기 힘든 꿈이며, 값진 순간인지. 퇴근하고 편히 소파에 누워 TV를 볼 수 있는 일상을 간절히 바랐던 그 시절, 장기하와 얼굴들의 앨범 수록곡 중 ‘별일 없이 산다‘를 정말 많이 들었다. 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새벽에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퇴근하고 돌아와 임용시험공부를 하다가 지친 마음으로 종종 생각했다. 이미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도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자격지심을 억누르며 생각하곤 했다. 그토록 바라던 취업을 하고 나서는 또 다른 목표를 가지고 남들과 비교하기 바빴고, 근심 걱정과 불안을 놓지 못했다. 그때 꿈꾸던 ‘별일 없이 사는 삶’을 비로소 이곳에 와서야 이룰 수 있게 되다니. 사누르에서 보낸 7주라는 시간 동안, 나보다 더 잘 났던 못났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 없이, 나의 몸과 생각에 집중하고 평범한 하루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은, 긴 호흡으로 지내야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있는 곳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