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 백서른다섯 번째

나무 심어놓고 나무 죽이기

by 나비할망

입추를 넘기면서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습니다. 어쩌다 구름이 드리우면 ‘아~ 가을인가’ 싶기도 하네요.


한라산과 오름 군락 위를 통통거리는 구름을 벗 삼아 한 발 한 발 오름 정상을 향합니다. 멀리 바닷가에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나란히 떠 있고, 곧게 깎여나가는 채석장 절벽, 곶자왈(또는 농지)과 이질적인 상판을 드러내는 태양열 발전, 물이 가득한 저수지 옆에 깡마른 저류지 등 자연 속에 남아 있는 영특한 영장류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예전에도 저곳이 이랬었나? 3년 전에는 저게 없지 않았었나? 3년 만에 달라진 강산을 바라보며 아무런 의미 없는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영주산은 2022년 논문 준비를 위해 한 달에 세 번씩 꼬박꼬박 찾았던 곳 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오름 입구에 방목 중이라는 빨간 글씨와 관리인의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고 이맘때쯤엔 방목한 소들이 탐방로를 가로지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지요. 지금은 소들도 보이지 않고 여름 동안 풀베기 작업을 하지 않았는지 탐방로 주변뿐만 아니라 지난 4월에 새로 설치한 야자 매트 위로 제법 풀이 자랐습니다.


4월에 왔을 때는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깡마른 줄기에 사방으로 늠름한 부목이 받치고 있는 것이, 언제 여기다 나무를 심었을까 하는 의문과 더 이상 영주산에서 방목을 하지 않기로 했나 보다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지요. 찬찬히 들여다보니 한 줄에 대략 13그루인데 살아있는 나무가 많아야 6그루, 적게는 3그루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살아있는 나무가 채 50%도 되지 않아 보였지요. 이파리를 보니 산딸나무입니다. 산지관리법령에서 어린나무(치수 稚樹)는 가슴높이 지름이 6cm 미만을 말하는데, 줄기만 남은 나무들은 딱 봐도 어린나무들입니다. 옮겨 심은 200여 그루 나무 중 절반 이상이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육지에는 산불과 산사태로 나무가 죽고 숲이 무너지는 뉴스로 시끌벅적하거늘 우리는 어린나무들을 심어놓고 죽게 하고 있다니.


영주산뿐만 아니라 올봄에는 백약이오름에도 편백나무 수백 그루가 옮겨졌습니다. 7월 가뭄을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벌써부터 잎이 시들시들하는 것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위태위태합니다. 작은 씨앗 하나에도 거대한 우주가 품어져 있다 하거늘,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며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다시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되는 이치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도로변에 새로 식재하는 ‘빽빽한’ 가로수와 오름에 옮겨심는 나무들 모두, 어른 나무로 자라 고령목이 되는 미래까지 내다보며 지혜롭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설마 나무를 심는 목적보다 ‘나무 몇 그루’라는 목표를 골인 점으로 두고 달리고 있나?


이런 식의 나무 심기라면 차라리 경북 의성군의 ‘고운사 사찰림 자연 복원 프로젝트’처럼 오름도 그대로 두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외치며 오름 녹화를 했던 과거와는 다른 오름의 경관 생태(식생)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무용하게 쓰이는 예산도 그러하지만, 단단한 부목 때문에 흙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어린나무들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zQmD_NQ1T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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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지구 생태계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베트남의 오염된 정글을 보라. 그러나 화학적 오염이 없는 경우에는 희한하게도 전쟁이 종종 자연을 살리기도 한다. 1980년대의 니카라과 반혁명 전쟁 동안 미스키토 해안 일대에서 극심하던 갑각류 및 목재의 남획과 남벌이 중단되자, 고갈되다시피 하던 바닷가재 서식지와 카리브해 소나무 숲이 훌륭하게 되살아났다.

그렇게 되기까지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물며 인간 없는 50년 세월은 어떻겠는가?

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


물결부전나비와 망초
암끝검은표범나비와 골등골나물
황알락팔랑나비
흰점팔랑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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