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 백서른세 번째

올레 7-1(2025년 6월 21일)

by 나비할망

안개가 사라지고 날이 개기를 바랐건만 종점에 이를 때까지 끝내는 맑은 하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신 운치 있는 숲길과 촉촉한 꽃치자를 만났고, 엊그제처럼 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는 무더위는 피할 수 있었지요. 올레길마다 동행하는 지인이 평소와는 다르게 파란 화살표와 리본을 놓치는 잦은 실수도 모두 안개 탓이라 얼버무릴 수 있었고요.


지난달에 걸은 7코스 마무리 지점인 서귀포 버스 터미널에서 시작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까지 이어지는 7-1코스(15.7km)는 엉또폭포를 만든 기암절벽과 울창한 난대림, 짧지만 거친 숨으로 오르는 고근산, 오름 분화구에서 논농사를 짓는 하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비닐하우스가 밀집했던 자리를 복원해서 만든 걸매생태공원도 뺄 수 없네요.


시작점 스탬프를 찍고 서귀포시 도심지를 1km 남짓 걷자 김창학공원 기후대응 도시숲이 나옵니다. 작년 12월에 조성되었는데 규모가 무려 13,883㎡(4,200여 평)라 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무엇으로 쓰였던 곳이었는지 궁금했답니다. 사라진 것들에게도 의미는 있었을 텐데요. 오늘은 안개가 짙어 심어놓은 나무와 풀꽃들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인공 숲의 나무들 사이로 서귀포 신시가지 전경과 바다까지 내려다볼 수 있을 듯하네요.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엉또폭포(4km 지점)에는 안개를 뚫고 날아다니는 황조롱이 가족의 울음소리(사람들이 너무 많이 온다고 경계하는 소리일지도)가 대신합니다. 며칠 전 한라산에 비가 제법 내렸던 것도 같은데 계곡 바닥도 말라 있고 절벽 바위도 조용하기만 해서 숲길을 빠져나오는 내내 황조롱이를 비롯해 검은등뻐꾸기, 두견, 직박구리, 섬휘파람새 소리로 귀를 채워봅니다.


고근산 가까이에 이르자 오름을 소개하는 글귀가 적힌 간세가 얄미워집니다. ‘시야가 탁 트여 있어 마라도에서부터 지귀도까지 제주 남쪽 바다와 서귀포시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귀포 칠십 리 야경을 보기에 좋은 장소다.’ 조망권을 포기당한 고근산이라...... 그렇다면 오늘은 안개 낀 정자에 앉아 고즈넉하게 점심 도시락을 먹는 이야기로 오늘의 의미를 만들어 봅니다. 청양고추와 바질 페스토 향이 살짝 깃든 유부초밥과 덜 익은 열무김치가 메뉴입니다. 안개와 겸상하니 참으로 꿀맛이로다~~~~.


종점을 3km 남짓 남긴 지점인 하논에 이르니 멀리 백로 무리가 보이고 모내기 준비를 위한 모판이 가지런합니다. 하논은 제주의 오름 중 물이 가득한 분화구에서 논농사를 짓고 있어 지질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독특한 특징을 가진 오름입니다. 그런데 왜 6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거늘 이 시기까지 모판이 가득 남아 있는 걸까요? 동행하는 지인이 말하기를 올해 봄 기온이 예년에 비해 낮은 편이라 그렇다고, 육지에는 모내기만 세 번 한 곳도 있다고 하네요. 하긴 한라산에서도 꽃이 피는 시기와 나비들이 출현하는 시기가 예년보다 적어도 열흘은 늦어지는 것 같았는데 남쪽 바다 가까이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천지연폭포를 만드는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걸매생태공원을 빠져나오며 작은 인공 폭포와 인사를 나누고 꽃향기 흩날리는 천지동 풍경 오솔길을 따라 시간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덧 마무리 지점입니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안개 속 올레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올레7_1 #엉또폭포 #고근산 #하논 #때죽나무납작진딧물_충영 #황알락팔랑나비 #꽃치자

................................................................................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


시작점
벽을 따라 자라난 나무들
엉또폭포 가는 길
엉또폭포와 계곡
고군산 탐방로
안개 가득한 고군산 정상
벽에 드러난 나무 뿌리
하논 분화구
가지런한 모판과 비어있는 논
걸매생태공원
천지연폭포 상류
마을 벽화에 새겨진 옛 하논 모습
감귤 꽃이 진 자리
꽃치자
때죽나무납작진딧물 충영
마삭줄
황알락팔랑나비


작가의 이전글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 백스물아홉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