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물오름
이맘때면 고사리장마가 시작될 법도 한데 비 소식이 뜸한 요즘입니다. 원물오름 입구 연못 수위도 한창 낮아졌고, 씩씩하게 새 줄기를 뻗어가야 할 수련도 기를 펴지 못하는 듯하네요. 따사로이 살랑이는 봄볕 덕에 올벚나무는 백발의 꼬부랑 할망 머리처럼 풍성한 꽃이 만발했습니다.
작년 4월 이후 정확히 1년 만에 다시 찾은 원물오름 탐방로는 사람이 그랬는지, 방목한 말들이 그랬는지, 거친 물살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경사진 오름 탐방로가 깊게 파였고, 심한 곳은 무릎 높이의 돌부리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초원이 펼쳐지던 오름 풍경이 한 해가 다르게 곰솔 군락으로 뒤덮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 중 하나로 예전처럼 소나 말을 방목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원물오름처럼 일부 오름은 방목한 마소(말 때문인지는 모를 일입니다만)에 의해 오히려 생채기가 지속되기도 하지요. 단순히 흑백논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오름 훼손 해결 방법의 한계인 듯합니다.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들 사이로 마른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달고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상수리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대부분의 낙엽수는 추운 겨울이 오면 떨켜를 만들어 잎을 떨어낸답니다. 잎이나 열매 등이 줄기에서 떨어져 나갈 때 연결되었던 부분에 생기는 특수한 세포층인 떨켜는 수분 손실과 세균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원물오름의 상수리나무를 비롯해 떡갈나무, 밤나무와 같은 참나무과(科) 식물은 더운 지역 출신이어서 떨켜를 만들 줄 모른다고 합니다. 따뜻한 남방지역에서 사는 식물은 수고스럽게 떨켜를 만들면서 낙엽을 떨궈야 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대 지역에서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일부 참나무과 나무들은 마치 새순을 보호하기 위해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묵은 잎을 봄까지 걸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답니다.
상수리나무의 마른 잎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제비꽃과 양지꽃을 넘나들며 꿀을 먹는 극남노랑나비는 양지꽃 무리 속에다 알을 낳을 것이고, 노랑털알락나방 애벌레와 천막벌레나방 애벌레들은 어른 나방으로 날개돋이할 것이며, 아직은 설익은 듯 붉은빛이 남아있는 상동나무도 새콤달콤하게 익어가겠지요. 간간이 봄비만 내려주면 금상첨화인 봄날의 오름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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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 라면을 끓이며(밥), 김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