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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샤나 Jun 15. 2020

엇갈림의 대가, 왕가위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에 드러나는 '엇갈림'의 연출

“마음은 늘 돌아보고 싶은데...상대가 안 돌아볼 것 같으면 나도 안 돌아봐요.”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대사다. 상대와 멀어져 갈 때 뒤를 돌아보냐는 물음에 은수가 내놓은 대답이다. 나는 은수가 '마음의 엇갈림'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보고 싶어 뒤돌았지만 상대는 제 갈 길을 가는 걸 보았을 때, 그건 단순히 시선의 엇갈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마음만큼 크지 않은 상대의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불편한 진실을 굳이 확인하게 될까 두려워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뒤돌아보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은 평생 미지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이유로 상대가 자신을 보지 않을때야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응시하는 사람도 있다. 상대와 자칫 눈이 마주치면 내 감정을 들킬까 두려워서다. 어쩌면 한 곳에 시선을 두는 것 자체가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행동이다. 마음을 숨겨야 하는 사람에게는 모험과도 비슷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시선의 엇갈림만큼 등장인물 여럿의 마음 상태를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 쉬워 보이는 방식이지만, 배우의 연기력과 구도 등 연출이 매우 중요하다. 이걸 제일 잘 하는 감독이 내게는 왕가위다. 왕가위는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마음의 엇갈림, 즉 완벽하게 합치될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 중 <아비정전>은 모든 등장인물의 마음이 합치되는 순간이 없다는 점에서 엇갈림의 정수다.


아비와 양어머니의 관계를 보자. 정을 주지 않는 양어머니로부터 아비는 늘 애정을 갈구했다. 자신을 낳아준 생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비는 핏줄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자신이 아비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시선이 담긴 장면이 참 좋았다. 아비는 물기 어린 눈으로 창가에 선 어머니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집을 떠난다. 아비가 갔을 때에야 어머니는 뒤를 돌아보고 회한의 눈빛으로 아비가 서 있던 장소를 쳐다본다.


아비가 친어머니를 보러 간 필리핀에서도 시선은 엇갈린다. 친어머니는 창밖 너머로 멀어지는 아비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아비가 뒤돌아본다면 둘은 눈을 마주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비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로부터 환대든, 후회든, 지난 세월에 대한 변명이든 받을 거라 기대했을 아비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어머니를 뒤로 하고, 아비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삭히며 걷는다.


영화 <해피 투게더>

<해피 투게더>에서 보영과 아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를 숨막히게 한다. 그럴 때마다 보영은 일방적으로 떠나고, 일방적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자는 말로 만남을 재개한다. 그 말을 아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휘가 잘 때는 보영은 깨어 아휘를 바라보고, 반대로 보영이 잘 때 아휘는 자는 보영의 얼굴을 응시한다. 두 사람이 감싸안고 춤을 추는,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에는 '끝'이라는 제목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가장 가까워졌을 때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왕가위 영화 주인공들은 행복할 틈이 없다. 나는 이 수많은 새드 엔딩들이 왕가위가 어떤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지 수없이 질문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묘사하는 불행한 사랑들은 모두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모든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비 역시 나약하다. 한 사람에게 온전히 전념하면 자신의 초라함까지 드러내게 될까봐 두렵다. 연인이 정착, 결혼, 취직을 입에 올릴 때쯤 관계를 끊는다. 사람은 홀로 존재할 때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서 사랑을 하지만, 동시에 그 나약함 때문에 사랑은 불행해진다. 왕가위는 나약함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 시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 눈길을 주는 것은 신체적으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을 때 인간의 무력함은 극대화된다.


왕가위가 과대평가된 감독이라는 평가를 가끔 듣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특히 장국영과 함께한 작품을 더 사랑한다.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하기에 장국영은 더없이 좋은 배우였다. 올해 4월에도 그가 출연한 작품을 다시 꺼내 보았고, 그때 적어뒀던 글은 감정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지금이나마 정리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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