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쇼샤나 May 15. 2020

노래를 보다

영화 <에이미>

몇 년 전 유럽여행 중 체스키 크롬로프라는 체코의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전까지는 주로 저렴한 호스텔이나 한인민박에서 묵었지만 체스키 크롬로프는 일정의 막바지에 방문한데다 물가도 싸서 홧김에 호텔을 예약했다. 호텔 침대에 누워있자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지난 20여일 동안 이렇게 조용하고 운치 있는 숙소는 없었다. 침대는 푹신했고 욕실은 깨끗했다. 게다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기에 편안했다. 이게 얼마만에 주어진 자유인가! 신이 나서 커튼을 여니 창밖에는 반짝이는 체스키 크롬로프 성이 보였다. 아름다움이 충만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노래를 제대로 감상한 건 그때였다. 기분을 북돋기 위해 랜덤재생으로 틀어놨던 음악 중 재생된 게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Take the box>였다. 그전까지는 앞 트랙 <Stronger than me>, <You sent me flying/Cherry>밖에 몰랐는데. 한순간에 멜로디에 꽂혔고, 에이미의 다른 노래들을 연달아 들으며 밤을 보냈다. <Take the box>는 영어를 못하는 막귀로 들어도 우울한 내용인 것 같았다. 반면 <Moody's mood for love>는 즉흥적인 재즈 곡이었다. 한정된 멜로디에 구겨 넣듯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가사들이 흥미로웠다. 상반된 분위기의 두 곡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 때는 아무 맥락 없이 들었다면 영화 <Amy>에서는 노래를 '보았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영화를 통해 아무것도 모른 채 들었던 노래들의 가사와 작곡 배경을 알게 되어 새로웠다.  18세의 재능 넘치는 소녀가 첫 음반을 내기 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I heard love is blind>를 들려줄 때는 수줍어 보였다. 나이가 많지만 성숙하지는 않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Stronger than me> 가사를 썼다. 무책임했던 아버지에 대한 회의감을 <What is it about men>에 담았다. 멜로디로만 즐겼던 노래가 그녀가 그때그때 처했던 상황을 충실히 담는 일기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노래가 다르게 와닿았다. 노래를 쓸 당시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그 날것의 솔직한 감정을 어떻게 수백만 명의 사람이 듣는 앨범에 공개할 생각을 했을까(물론 그녀는 앨범을 낼 때 자신이 장차 유명한 가수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이렇게 과감하게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는 게 두렵지 않았을까.


 2집인 <Back to black>은 더 성숙해졌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만날 때 <Some unholy war>라는 곡을 썼다. 연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전쟁을 끌어왔다. 성스럽지 않더라도, 제아무리 추악한 전쟁이더라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선 기꺼이 참전하겠노라. 가사로만 따지면 허세에 가득 차 있으며 오글거린다고 욕먹기 딱 좋지만 상대방에겐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낭만적인, 세상에 둘도 없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명곡으로 회자되는 <Back to black>을 작곡할 때는 상황이 아주 안 좋았다. 그녀가 더없이 의지하던 사랑이 잠시 떠났을 때였다. 알콜과 마약에 쩔어 있던 그녀를 파파라치는 집요하게 쫓아가 플래시를 터뜨렸고 토크쇼에서는 희화화했다. 그 상황에서도 <Rehab>이라는 곡은 재활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을 비정상 취급하는 시선에 정면으로 맞선다.

  

'요절한 천재 가수'라는 말은 늘 에이미 와인하우스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내게는 없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며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사실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솔직히,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편협했다.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그녀의 노래를 즐겨듣는 팬들 중 아시안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 팬들을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그런 발언은 해서는 안 됐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쉽게 믿음을 주고 의지했다. 사랑을 잃으면 온몸을 내던져 절망했고, 다시 돌아오면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그녀는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만큼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앞으로 그녀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담고, 그녀의 일생에 대한 서사까지 형성하는 음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티스트가 나올 수 있을까 싶다. 우리가 철없는 한 때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처 올리지 못하는 감정, 혼자 쓰는 일기장에나 적는 절절한 그 날의 느낌을 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그녀의 노래가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이유는 멜로디도, 독특한 목소리도 한몫하지만 무엇보다 진솔한 그 가사라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 그건 환상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