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를 다녀온 후 몸과 정신이 무너져 버렸다. 한동안 복용하지 않던 신경 안정제가 없으면 현관문을 열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처절하게 삶과 싸워온 나의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싶은 마음도 들기에.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오늘 새벽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 감자를 안고는 만지작 대던 전화기 속 영상에 연극 '빨래'의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을 되돌려 보았던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였기 때문이다. 한국 도착 후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란 원래 이기적인 동물이므로.
한국 색면화가 1세대 박서보를 이은 2세대 이종승 선생님은 80세라는 나이를 불구하고 나에겐 아빠이자 친구이자 동반자이시다. 힘들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늘 선생님께 연락하여 눈물과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기댈 언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선생님께 감사를 전한다.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고 나란 사람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 또한 가늠할 수 있었으며, 평소 일을 할 때면 사람을 믿지 않는 나는 이번 일의 과정 중 사람의 관계에 흔들렸었던 것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었다. 친분과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거늘. 앞으론 나만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란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이기에. 여기서 좋은 결과란 좋은 작품으로 서사가 있는 전시회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좇고 화가들을 이용하는 그런 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나는 그럴 자신도 배짱도 없는 사람임을 잘 안다.
며칠 전 이종승 선생님의 저서를 집필(4월말출간예정) 중인 미술평론가 신항섭 선생님과의 통화 중 이종승 선생님의 전시경력을 줄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 여기서 어떻게 더 줄이죠? 그냥 한 줄만 쓰고 다수의 전시회, 대표전시회만 명기라고 정리할까요?"라고 하자 "일단 다시 정리해서 보내 봐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 알겠습니다. 화창한 봄날 글 쓰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얼굴 함 뵈어요"하며 통화를 마쳤다. 이종승 선생님은 60년 동안 화단에서의 활동에서 갖게 된 수많은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고 늘 말하신다. "아~ 그까짓 거 그냥 빼. 그림이 중요하지 그게 뭐가 중요해?" 선생님의 이력을 정리하던 중 프랑스 글로벌 저작권자 연합회 정회원 ADAGP과 같이 중요한이력도 다 빼 라신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이것만큼은 넣어 버렸다.
신항섭 선생님의 글은 늘 편안하다. 여타의 평론가들의 글과는 다르게 착하다 그리고 곱고 편안하다. 나의 주변에 있는 한국의 미술인들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특별한 말이 없으시다. 늘 응원을 하실 뿐. 이번 하노이 전시회를 기획하며 있었던 일들은 20여 년이 넘도록 미술계 일을 하며 처음 겪어 보는 일이라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차분히 내가 하여야 할 말들은 모두 나열하여 협회에 전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솔직히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나이가 더 들어가면 주변의 참어른들의 모습과 같아질 수 있도록 하려 한다.
너무 오래 쉬었다. 일을 다시 시작하며 개인적으로 살피지 못했던 몇 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해외 그중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를 선택했으니.) 그 사항들은 내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항들이었다. 이런 점을 느끼기 위해 나에겐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잃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위로를 하여 보며 내 생에 남아 있는 시간들을 잘 채워 나가리라. 봄비가 내리는 아침 생각을 정리해 본다. 그리고 베트남이 아닌 다른 나라를 추천해 주신 Mr Scott님에게도 감사를 전해 본다. 또한 아이 넷을 혼자 돌보며 하노이를 떠나는 내게 맛있는 커피를 한 가방 전해 준 이쁜 베트남 남동생 첸의 아내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