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 / 신예희 저
나도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여행 깨나 다닌 다는 사람들 치고 이렇게 오랫동안 여권을 묵혀둘 거라고 감히 생각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내 여권은 21년 6월에 만료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21년이 시작하자마자 여권 갱신한답시고 난리를 쳤겠지만 21년 1월이 찾아오고 미래를 예측할 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여권을 사용할 일은 없어 보였다. 기한이 들어찼음에도 누구도 내게 여권을 갱신하라 말하는 이가 없었고, 그렇게 상상하기 힘든 여권 없는 나의 일 년이 지났다. 최근 전자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새로 나온 건 일단 해보는 타입) 찾아갔더니 거기 여권번호가 필요하다고 해서(전자 면허증은 현재 영문으로만 발급 가능하단다) 슬슬 여권을 만들어야 하나 드릉드릉 대는 중이다.
신예희 작가는 북리뷰를 시작하며 알게 된 몇 안 되는 보석 같은 작가다. 그의 전작 <돈 지랄의 기쁨과 슬픔>을 감명 깊게 본 이가 어디 나뿐이겠냐마는 이 분 진짜 글 맛있게 쓴다. 감칠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낄낄거리며 보고 또 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야 많고 또 많다지만 어쩌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새삼 그 능력에 감탄하며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봤었는데 이번에 그의 신작이 나왔다.
책은 제목 그대로 여행 타령 에세이다. 여행 에세인데, 글을 쓰기 위해 어딜 찍어놓고 다녀온 게 아니라 예전에 다녀왔던 여행 썰들을 끄집어 내서 여기저기 걸쳐 놓았다고 해서 여행 타령 에세이다.
꾼들에 비하자면 초라하지만 나 또한 일 년에 두세 번은 비행기 타야 하는 아마추어 여행러로써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의 지난한 여행들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떠난 태국(정확히는 파타야의 밤거리에서 똠양꿍 시켜놓고 한 숟갈 퍼먹고 그대로 놓고 온 테이블과 노어이 표정의 주인아저씨)이 떠올랐고, 여행 첫날 해치워버려야 했던 각국의 스타벅스(와 시티머그)가 떠올랐고, 5일째 같은 버스 플랫폼에 서며 그 사이 익숙해져 버린 도쿄의 버스 번호(이거 타면 시내로 가고, 이거 타면 북쪽으로 등등)등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레고랜드 앞에서 당황한 내게 친절히 '삼촌 손잡아' 해주신 어머니와 자연스레 내 손을 잡고 웃어준 꼬마 아이가 떠올랐고(핫도그로 보답했다), 아 일본과 한국, 중국 사람들끼리는 언어를 공유하냐고 천진난만하게 내게 묻던 포르투갈 아저씨도 떠올랐다.(이거 설명한다고 한 시간 이상 잡혀있었음)
그런데 이 여행 상실 증후군은 내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카페에서는 뜬금없이 기내식을 팔기 시작했고, 현지 가이드와 유학생은 랜선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다.(나 이걸로 파리도 가보고, 홍콩도 가보고, 스페인도 가봤다...) 심지어 진짜 비행기에 올라 그 나라 영공을 두어 바퀴 돌고 돌아오는 상품도 만들었는데 이게 팔렸다니 진짜 우리나라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긴 하다.
여하튼 이 책은 이런 여행 고픈 이들에게, 이제 여행이 무엇인지조차 가물가물한 이들에게 '우리 이렇게 여행 다녔잖아!'라고 말해준다. 머잖아 열릴 하늘길을 예비하는 예고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좁아터진 이코노미와 입국 심사대에서 나를 째려보는 공무원의 눈길, 그곳을 지나쳐 공항 로비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온갖 국적의 사람들과 낯선 글씨로 쓰인 간판 그리고 뒤따라 불어오는 습한 바람과 기분 좋은 여행의 설렘이 그려지는 순간.
자, 이제 다시 가방을 쌀 시간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 / 신예희 저 / 비에이블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