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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짱고책방

디지몬에서 시작된 천선란의 다정한 세계

아무튼 디지몬 | 천선란 저

by 짱고아빠

책을 펼치다 응? 했다. 천선란?<천 개의 파랑>의 그 천선란? 그가 <디지몬>을 봤다고? 아니 아무튼 시리즈를 썼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잘 그려지지 않는 조합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고백한다. 지금도 단 하나의 SF 물을 추천한다면 거리낌 없이 <디지몬>을 추천할 거라고. 조금은 충격적이기까지 한 이 사실 앞에 나는 디지몬을 본 적이 있나 되짚어 보았다.


그랬다. 나에겐 디지몬이 포켓몬의 사촌쯤으로만 남아 있었다. 사실 디지몬을 보던 세대가 아니긴 한데 그랬거나 어쨌거나 나는 세상의 모든 아동 애니메이션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선란의 이야기를 읽으며 깨달았다. 그에게 디지몬은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 함께 진화하는 이야기였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콘텐츠는 달라진다 하며 글 쓰는 사람이 그걸 몰랐다 그래.


디지몬은 끊임없이 강해지기 위해 진화한다. 그런데 그가 확인한 '진화'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힘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한 변화다. <천 개의 파랑>에서 보여진 인물들의 다정함은 어쩌면 여기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SF는 차가운 기술의 이야기 혹은 누군가 싸워 이기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다정함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였고 <디지몬>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게 그에게 디지몬은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이자, 인간과 기술, 상실과 회복의 관계를 처음으로 이해하게 만든 첫 번째 우주가 되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 어쩌면 내가 사소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도 어릴 적 좋아했던 <나디아>와 <은하철도 999>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사실 그때는 몰랐다. 생각해 보니 나디아와 철이와 메텔이 깔아준 우주 속에 나 역시 살고 있었다. 천선란이 디지몬을 통해 꺼내는 감정은 사실 모두의 기억 속에도 흐른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책에는 작가는 이런 다짐을 했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소설가란 단어는 어쩐지 너무 무겁고 중후한 느낌이라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내 작가도 너무 멀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행여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가족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잘 버티는 것이 모두가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길이었다고, 주어진 길을 잘 지키고 서 있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아마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각자의 디지몬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음악이든, 그림이든, 혹은 오래된 기억이든.

아니면 꿈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일지도. 그리고 그것들을 계속해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 선택해야 할 시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사실 우리의 몫이다. 그 선택이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언제고 다시 그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꽤 오래된 기억을 되짚으며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 되어있고, 무엇이 되려 하는가.

그리고 그 꿈을 응원하던 것들은 지금 무엇이 되어있는가. 갑자기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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