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 관하여 | 이금희 저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줄 것 같은 이금희 아나운서의 에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뿐은 아닌 것 같다.
라디오든 TV든 늘 그랬다. 마주 앉은 이의 눈을 마주하는 그의 목소리는 서두르지 않았고 상대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마치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했다.
그런 그의 책 <공감에 관하여>를 읽으며 나는 그 눈빛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자주 너무 빨리 결론으로 가려 한다.
상대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들으면서 다음에 내가 해야 할 좋은 말, 도움이 되는 말, 그럴듯한 해답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금희의 글은 그 모든 조급함을 조용히 내려놓게 만든다.
공감은 무언가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용기. 아니 그저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말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삶을 살아본 적도 없고, 같은 시간 같은 조건에 서본 적도 없다. 그러니 어떤 사연 앞에서는 '모른다'는 말이 오히려 가장 정확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엄마의 기대에 눌린 딸의 마음, 회식 자리에서 숨이 막히는 직장인의 하루, 고부 갈등으로 마음이 닳아버린 사람들의 사연은 모두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금희는 그 얼굴들 앞에서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그런 적 있었지 않느냐고. 나도 그랬다고.
이 짧은 연결이 공감의 시작임을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왔다.
36년간 수만 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분명히 알게 된 것 같다.
중요한 건 말의 기술이 아니라 듣는 태도다.
"서로를 알아주는 한마디가 꽁꽁 언 마음에 봄을 불러옵니다."
이 문장은 이 책을 가장 잘 요약한다. 우리는 종종 말로 상처를 준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상처는 남는다.
우리는 세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주 함부로 말을 던진다.
이금희는 공감을 거창한 윤리나 덕목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아주 생활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여행 중에 "이게 다 한국 돈으로 얼마니?"라고 말하는 엄마의 말도 소비를 비난하는 잔소리가 아니라 자식의 삶을 걱정하는 방식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렇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는 태도, 그것이 막힌 대화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
공감은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리를 만들어준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말할 수 있는 자리, 판단 받지 않아도 되는 자리, 울어도 괜찮은 자리.
그 자리에서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을 풀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과 오해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공감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오늘을 조금 견디게 만든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공감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조언을 멈추고, 평가를 미루고, 그저 옆에 앉아 있는 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얼마나 필요한지.
아마도 이금희가 오랫동안 마이크 앞에서 배워온 것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공감에 관하여>는 말하기의 책이 아니라, 듣기의 책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변화시키려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래, 나도 그랬지. 그렇게 마음속에서 작은 봄이 시작된다.
요즘처럼 연결보다는 단절이 익숙한 시대에, 이 책은 조용한 독서가 된다.
감정의 속도를 늦추고, 타인의 삶 앞에서 잠시 멈춰 서게 한다.
공감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는 사실을, 이금희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건네준다.
책을 읽으며 꽤 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슷한 일로 내게 말을 건네준 사람들, 너무 함부로 내 뱉었던 나의 실수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
모자라고 어렵지만 한 번 더 말을 줄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