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
제주에서의 여행은 늘 계획보다 느슨해진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걷다가도, 바람에 밀리듯 골목 하나를 더 꺾고, 간판 하나를 더 바라보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책방,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종이 냄새와 낮은 조명. 그 안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펼쳤고, 딱 한 단락을 읽고 나서 계산대로 향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마음이 같았다. 너무 정확해서, 도망칠 수 없을 만큼.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무엇일수있는지>는 그렇게 내 가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문단에서 어떻게 읽히는지는 그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버텨낸 시간 이후에 남는 감정’에 대한 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젊음이 실패와 만났을 때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하게 되는지를 가만히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청춘의 한 장면으로 계속 되돌아갔다. 세상에 한 발짝도 제대로 딛어본 적 없으면서, 이상하게도 세상 전부를 이해한 사람처럼 굴던 시절.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더 큰 목소리를 냈던 때. 용기라는 말을 앞세웠지만, 사실은 가난과 청춘과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를 밤마다 계산하며 잠들지 못하던 시간들. 이 책의 문장들은 그 시절의 나를 불러냈다. 기억은 언제나 그렇게, 문장을 통해 되살아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질문은 ‘나는 그때 왜 그렇게까지 버텼을까’였다. 저자의 글은 놀라울 만큼 솔직하다. 스스로를 미화하지도, 실패를 교훈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장면에서는 철저하게 바닥으로 내려가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미친 듯이 웃긴다. 그 웃음이 더 아픈 이유는,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을 독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마음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고, 책장을 덮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 모든 감정의 낙하가 끝난 뒤에야, 아주 천천히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
이 책은 읽힌다기보다, 내 안의 어떤 기억을 대신 읽어주는 책에 가깝다. 문장은 설명하지 않고, 감정은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한 지점에 독자를 세워두고, 그 앞에 서 있는 감정을 스스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누군가의 인생을 요약해주는 성공담도 아니다. 서평을 쓰며 무엇을 배웠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대신 ‘아, 나도 그랬지’라는 문장이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된다.
요즘처럼 모두가 앞서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이 책은 유난히 조용하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이 글은 요즘 버티고 있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는 사람에게, 혹은 이미 지나온 시간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는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당신이 이 책을 만날 때가 이미 지나간 과거일 수도 있고, 이제 막 시작될 현재일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삶의 어느 순간엔 이 감정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서점의 구석에서, 아무도 추천하지 않은 채 놓여 있는 이 책을 발견한다면 잠시 멈춰서 한 단락만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 그 단락이 당신의 기억 하나를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 기억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