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깊고, 이처럼 웅장한 협주곡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61

by 꿈싹지기


바이올린 협주곡의 에베레스트
브람스,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 협주곡의 출발점
모든 바이올리니스트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보게 되는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의 베토벤을 보거나 혹은 그의 시그니처 같은 초상화에서 느껴지는 신경질적인 인상을 떠올려 본다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도대체 너무나 평범하고 괴팍한 노인 같은 그에게서 어떻게 이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이 의구심은 물론 천재적인 그의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천재적인 능력의 소유자이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그의 성격에서 상상하기 힘든 낭만적인 애상과 극치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에 관한 지극히 보통 사람인 나의 의구심이다.


때로는 아름답다 못해, 너무나 잔인하게 아름다운 멜로디에 빠져들 때면 더더욱 그런 생각에 젖어든다. 도대체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왜 인간들의 능력은 이렇게 수천의, 수만의 갈레로 다양하게 전개되며 그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가? 너무나 평범하게 표출되는 인간의 본성에 극적으로 대비되는 그의 음악적 상상력을 연결시키는 것이 때로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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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 치열했던 회사 일에 몸과 마음이 치어서 지내던 시절에 한동안 바이올린 협주곡에 몰두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감상에 집중하던 초기에 정경화의 음반을 스탠더드로 삼아서 듣기 시작하면서 특히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집중했었다. 공교롭게도 바이올린 협주곡을 한 곡 밖에 남기지 않았던 세 명의 작곡가, 베토벤, 멘델스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이 세 곡을 집중적으로 감상하면서 어느덧 이 곡들에 익숙해지던 때가 오자 약간은 난감한 상황이 생겼다. 친숙함과 동시에 이 세 곡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회사에 출근하던 짧은 순간의 차 안에서 혹은 업무 중에 잠시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도 이 곡들은 번갈아가면서 내 차 안을 가득 채우던 멜로디가 되었지만 갑자기 머릿속에서 문득 이 곡들의 멜로디를 떠올릴 때면 이 세 곡이 구별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작곡가들의 개별적인 특성에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구별이 되지만, 그때는 이 세 곡을 구조적으로 구별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내 머릿속에서 작은 전략을 세우기도 했었다.

□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팀파니의 5 연타와 클라리넷, 그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시작되고 약 3분 30초 후에 바이올린 역시 오케스트라 연주에 걸맞게 웅장하게 시작된다.
□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이올린이 바로 시작되면서 낭만적인 멜로디에 젖어들게 만든다.
□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낭만적인 애상을 담은 오케스트라 연주로 시작해서 약 50초 후에 바이올린 역시 애상적인 멜로디로 시작한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왜 특별한가?


이 곡은 클래식 음악사에서 '바이올린 협주곡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베토벤이 남긴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는 유일하고, 이전 시대의 협주곡들이 독주자의 기교를 뽐내는 데 집중했다면, 이 곡은 교향곡에 가까운 웅장한 규모와 깊은 철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교향곡 같은 웅장함

우선 웅장하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이 서로 격렬하게 달려 나가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는 가장 웅장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오케스트라가 단순히 반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바이올린 솔로와 대화를 나누는 듯 전개된다. 이전의 비발디나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바이올린이 주인공이 되어 연주하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각각의 위치를 가지고 대화를 하면서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팀파니의 5 연타

D–A–D–A–D, 이렇게 팀파니가 5번 두드리며 곡을 시작하는 형식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오프닝이었다. 단순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리듬의 뼈대를 이루고 곡 전체를 지탱하는 '심장 박동' 같은 역할을 한다. 팀파니 5 연타와 같은 리듬이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계속 반복이 되면서 묘한 긴장감과 함께 통일성을 준다.


D장조의 밝고 당당한 울림

D장조 특유의 밝고 당당한 울림이 곡 전체에 흐른다. 중음역의 따뜻한 음색을 적극 활용하면서 뛰어난 기술보다는 깊은 사유를 가지고 연주하게 한다. 3악장에 이르러서는 쾌활한 분위기로 이어여 듣는 이에게 해방감을 준다.


악장별 특징


1악장 Allegro ma mon troppo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약 25분에 달하는 규모로 길고 웅장하다. 서두의 오케스트라 제시부는 거의 교향곡 수준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위엄 있게 주제가 전개된다. 연주의 기교를 한껏 느끼게 만드는 현란함에 연주에 빠져 있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가 버린다.


2악장 Larghetto (약간 느리게)

명상적이고 기도하는 듯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멈춘 듯 평온한 선율이 매력적이고 내면의 고요가 느껴진다. 현악 피치카토 위에 바이올린이 잔잔하게 연주하는 부분은 기도처럼 노래하는 것 같다.

* 나는 이 악장에서 고요한 오케스트라 배경 위에서 바이올린이 애달프게 노래하는 연주음은 칠흑 같은 밤하늘에서 별이 고요히 반짝이면서, 잔잔히 흐르는 듯한 환상을 느낀다.


3악장 Rondo. Allegro (주제가 반복되며 빠르게)

2악장에서 쉬지 않고 바로 이어지는 Attacca 형식이다. 민속적인 춤곡 느낌의 리드미컬하고 활기찬 악장이다. 소박하지만 품격 있는 즐거움을 지니고 있어 민속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초연과 카덴자


초연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06년 12월, 프란츠 클레멘트에 의해서 빈에서 초연되었다. 클레멘트의 작곡 의뢰를 받은 베토벤이 공연 직전에야 이 작품을 완성해서 클레멘트는 거의 연습이 없이 초견만으로 이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공연은 잘 이루어져서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지만 바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곡도 너무 길고, 연주가 너무 어려운 점도 있었다.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베토벤 사후인 1884년에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12세의 신동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이 연주하면서 비로소 세기의 명곡으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지금 연주되는 버전은 베토벤 본인이 다시 이 작품을 다듬으면서 피아노 버전까지 만들어 1809년 3월에 출판한 것이 오늘날에 연주되는 버전이다.


카덴자

베토벤은 이 곡의 카덴차(Cadenza)를 따로 남기지 않았다. 비르투오조 시대에 거장들이 남긴 카덴자를 연주자들이 선택해서 쓰고 있다.

○ 요아힘 카덴차 (가장 정통) : Leonid Kogan, Henryk Szeryng

○ 크라이슬러 카덴차 (더 낭만적) : Itzhak Perlman, Anne-Sophie Mutter, 정경화

○ 베토벤이 피아노 편곡판에 쓴 카덴차를 바이올린용으로 편곡해 쓰기도 함 : Hilary Hahn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카덴자를 참고해서 자신이 바이올린적인 언어로 완전히 새로 재구성한 카덴자를 연주하는데, 가장 베토벤적인 카덴자라고도 한다.



추천할 만한 연주


정경화 1989

Klaus Tennstedt &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Kyung-Wha Chung' / Klaus Tennstedt &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in Amsterdam, 1989


정경화의 연주는 언제나 단단하고 섬세하면서도 치열한 느낌이어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에도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중 그의 가장 명반으로 꼽히는 것은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1979년 녹음이다. CD로 들을 때는 이걸 가장 많이 듣게 되지만, 영상으로 감상할 때는 아무래도 정식으로 발매된 1989년, 클라우스 텐슈태드가 지휘하는 로열 콘세르헤보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이다.


그의 연주는 보잉이 길고 견고해서 에너지가 엄청나게 느껴지고 긴장감을 흔들리지 않고 유지하는 힘이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서 뛰어나다고 느껴진다.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합니다. 표현력도 날카롭고 과감해서 섬세한 파워가 느껴진다. 비브라토는 살아 움직이면서 꿈틀거리는 느낌이어서 소리의 끝이 완벽하게 처리되는 것 같아서 결과적으로 흔들림 없는 연주를 들려준다.


이런 점들이 이 연주에서도 잘 살아 있어서 연주를 보고 듣는 내내 몰입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다른 연주자들에게서 느끼기 힘든 그만의 마력이다.



Anne-Sophie Mutter

Herbert von Karajan & Berliner Philharmoniker

Anne-Sophie Mutter / Herbert von Karajan & Berliner Philharmoniker


카라얀이 발굴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안네 소피 무터는 강약 조절이 섬세한 편이고 깔끔한 편이다. 카라얀의 공연 영상은 잘 다듬어진 영상이어서 생동감은 조금 덜 하지만 정제된 느낌이 있다. 흔히 안네 소피 무터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대담한 해석과 카리스마가 있는 연주라고 알려져 있다.


현대적인 편안함이 느껴지는 연주 영상이지만, 반복해서 시청하다 보면 편집으로 다듬어진 영상에서 약간은 식상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Hilary Hahn 2025

Alain Altinoglu & hr-Sinfonieorchester

Hilary Hahn / Alain Altinoglu & hr-Sinfonieorchester (2025. 5. 9 Alte Oper Frankfurt)


힐러리 한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특징은 '경이로운 명료함'이라고 한다. 감성적인 면에 집중하지도 않고, 한없이 부드러운 느낌도 없다. 하지만 가장 명료하고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연주를 보여준다. 그는 어떤 난곡에서도 음정이 흔들리지 않으며, 지나치게 감상에 젖지 않는 것이 기본 스타일이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연주에서도 잘 드러나고 가장 스탠더드 한 연주를 들려준다. 비교적 최근의 연주인 이 연주 영상에서는 서정적인 느낌도 더해져 편안하게 감상을 하기에도 좋은 편이다.



Itzhak Perlman 1992

Daniel Barenboim & Berliner Philharmoniker

Itzhak Perlman / Daniel Barenboim & Berliner Philharmoniker (1992. 2. Konzerthaus Berlin)


이작 펄만의 연주는 언제나 서정성이 넘치고 따스한 느낌이 든다. 부드럽고 노련한 느낌을 풍기는 연주여서 단단하고 날카로움은 좀 덜한 편이다. 정경화의 연주를 자주 듣다 보니 이작 펄만의 연주는 지나치게 부드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는 필링이 넘치고 정이 가득한 연주이기도 해서 인간미가 한껏 느껴진다. 그래서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연주이기도 하다.


특히 2악장에서는 정경화의 연주가 진하고 아련한 느낌이어서 반짝거리는 느낌이라면, 이작 펄만의 연주는 표현력이 풍부해서 화려하고 감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