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문 첨성대 칼럼 2023년 7월 6일 게재
살아가면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항상 접하면서 산다. 우리에게 펼쳐진 세상과 주변의 환경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같은 외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현상에도 당연히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현상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객관화되면서, 그리고 내적인 현상, 이른바 심리적인 현상은 심리학 이론으로 객관화되면서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은 대부분 당연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고 전제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서 생겨나는 물질적인 현상을 잘 설명해 주던 과학적인 이론들은 우리에게 늘 당연한 사실로 와닿기도 한다. 그 사실들이 새로운 연구를 통해서 사실이 사실이 아닌 상황으로 가기도 한다. 오늘은 맞던 사실이 내일은 틀려진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이론들도 여전히 다툼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고 발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사실 하나는 객관적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과학적인 이론조차도 ‘지금’ 객관화되어 있는 사실만을 절대시 하는 가운데에서는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마음의 세계는 어떨까 생각해 본다. 외적인 현상조차 절대적인 객관화가 어렵다고 전제를 했지만, 설사 절대적인 객관화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이 그 객관적인 사실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가지는 오류는 외적으로 객관화된 현상들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 오류는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른다는 우스개 같은 현실에서 시작이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마음이 세세한 부분까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간혹 나와 생각이 비슷하거나 혹은 큰 갈래로 본다면 같은 행태를 보이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와 아무리 비슷한 사람도 결국은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물질적인 현상보다 더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어서 객관화하거나 갈래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것 아니야?’ 혹은 ‘당연히 그래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처한 상황이 비슷할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면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쉬워진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는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것이 오히려 속이 편하다. 그러면 적어도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문제는 생기지 않을 수 있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다툼 혹은 관계의 문제는 쟁점 그 자체의 문제보다는 각자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안에 대한 다툼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 다툼이 쟁점 그 자체보다는 서로 다른 관점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모든 다툼에는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아는 것 즉 ‘지피지기’를 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
‘지피지기’에는 순서가 중요하다. 상대방을 아는 ‘지피’보다는 나를 아는 ‘지기’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알아나간다는 것, 즉 나의 마음이 성격적으로 어떤 선호 경향을 가지고, 어떤 일에 흥미를 가지는지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모든 변화와 개선은 자기로부터 먼저 출발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전제를 갖게 되면 그 세상 속에서 나의 존재는 어떤 것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생긴다. 그 과정이 자기 탐색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