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문을 열면 내가 보인다

제1부. 태도 생활지원사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것

by cej


어르신을 판단하지 않는 기술


생활지원사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 안에 거대한 ‘잣대’가 하나 들어있음을 발견했다. 어르신 댁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잣대를 들이대며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청결 상태는 몇 점, 성격은 원만함, 인지 상태는 양호. 내 기준에서 벗어난 어르신을 보면 ‘왜 저렇게 사실까’ 하는 안타까움과 ‘이렇게 바꾸셔야 하는데’ 하는 오지랖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어르신을 위한 진심 어린 걱정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오만이자 성급한 판단에 불과했다.


판단하지 않는 기술은 내 안의 이 잣대를 꺾어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만나는 어르신들은 저마다 70년, 80년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몸 속에 품고 계신 분들이다. 내가 본 모습은 그 긴 세월의 아주 작은 단면일 뿐인데, 감히 그 단면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정의하려 했던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던가.


한번은 유독 집안에 물건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사시는 김 할머니를 담당하게 되었다. 거실부터 안방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낡은 잡동사니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장강박이 있으시구나. 위생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 다 치워드려야겠다’고 단정 지었다. 나는 방문할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압박했다. "어르신, 이거 다 쓰레기예요. 버려야 건강에 좋아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사세요?“


내 말에 할머니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실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구석에 쌓인 빛바랜 신문지 뭉치를 소중하게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2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보시던 신문들이었다. 구석에 쌓인 고물 같은 플라스틱 통들은 가난하던 시절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폐지를 줍던 할머니의 훈장이었다. 내 눈에는 ‘쓰레기’로 보였던 것들이 할머니에게는 ‘생의 증거’이자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기준에서의 ‘청결’과 ‘정상’이라는 잣대로 할머니의 소중한 기억을 난도질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판단은 이해를 가로막는다. 내가 할머니를 ‘저장강박 환자’로 판단하는 순간, 할머니의 ‘그리움’을 읽어낼 기회는 영영 사라지는 것이었다.


진정한 돌봄의 기술은 관찰하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어르신이 화를 내신다면 ‘성격이 괴팍하다’고 판단하는 대신 ‘어디가 불편하신 걸까, 혹은 무엇이 이분을 불안하게 만든 걸까’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르신이 약을 거부하신다면 ‘고집이 세다’고 치부하는 대신 ‘약의 부작용이 두려우신 걸까, 아니면 삶에 대한 의욕이 꺾이신 걸까’를 살펴야 한다. 형용사(괴팍한, 고집 센)로 어르신을 규정하는 순간 돌봄은 멈추지만, 의문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돌봄은 확산된다.


또한, ‘좋은 어르신’과 ‘나쁜 어르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고분고분하고 상냥한 어르신을 ‘좋은 분’이라 부르며 더 정성을 쏟고, 까다롭고 요구가 많은 어르신을 ‘힘든 분’이라며 기피하곤 한다. 하지만 생활지원사의 전문성은 바로 그 ‘힘든 분’의 이면을 보는 힘에서 나온다.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선인장 같은 어르신일수록, 그 속에는 더 깊은 상처와 지독한 고독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가시를 보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시 아래 숨은 여린 속살을 판단 없이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판단하지 않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내가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는 ‘괄호 치기’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입견들을 잠시 괄호 안에 묶어두고, 어르신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보는 것이다. ‘게으르다’ 대신 ‘오늘 오후 2시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라고 기록한다. ‘비협조적이다’ 대신 ‘목욕 보조 제안에 세 번 거절 의사를 표하셨다’라고 적는다. 감정과 판단을 배제하고 사실에만 집중하다 보면, 비로소 어르신의 행동 뒤에 숨은 진짜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르신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관심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분의 삶을 내 방식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지극한 존중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어르신의 세계관을 인정해드리는 것. 비록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일지라도 그분에게는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믿어주는 것. 그 믿음이 전달될 때 어르신들은 비로소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진실한 속마음을 보여주신다.


생활지원사는 심판관이 아니다. 어르신의 삶이 옳은지 그른지,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판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르신이 걸어온 긴 여정의 마지막 구간에 잠시 동행하는 동반자일 뿐이다. 동반자의 역할은 상대의 짐이 무겁다고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곁에서 보폭을 맞추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어르신의 문을 열며 내 안의 잣대를 내려놓는다. 내가 아는 지식, 내가 가진 상식, 내가 믿는 가치관을 모두 문밖에 두고 오직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분을 마주한다. 판단의 기술을 내려놓고 존중의 기술을 선택할 때, 어르신과 나 사이에는 비로소 따뜻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판단 받지 않고 온전히 수용되는 경험은 노년의 삶에 다시없을 치유가 된다. "자네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줘서 참 편해"라는 어르신의 말 한마디는, 내가 이 일을 하며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찬사다. 판단하지 않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르신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가장 정교하고도 따뜻한 돌봄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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