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중년, 길 위에서 멈춰 서다
다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다
나는 한동안 ‘잘 살았는지’를 남들 기준으로만 확인했다. 직장이 있으면 괜찮은 거고, 큰 사고 없으면 잘 산 거고, 남들보다 크게 뒤처지지 않으면 성공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본 질문도 늘 비슷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이만하면 잘 버틴 거 아니야?” 그 질문들에는 늘 ‘나’보다 ‘남들’이 먼저 들어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질문이 잘 안 맞기 시작했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하루를 보내는데, 마음이 자꾸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회사에 있는데, 나는 다른 데 있는 기분이었다. 집중도 잘 안 되고, 웃어도 오래 안 갔다. 이상했다. 특별히 망한 것도 없는데, 자꾸 헛도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나에게 물어봤다.
“너 요즘 어떠냐?”
생각보다 대답이 바로 안 나왔다. 바쁜데, 피곤한데, 괜찮은데… 같은 말만 맴돌았다. 정작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는 상태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내 상태를 묻지 않고 살았다는 걸. 해야 할 일만 체크했지, 내가 어떤 얼굴로 살고 있는지는 잘 안 봤다.
예전의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성격도 알고, 장단점도 알고, 싫어하는 것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년이 되고 보니, 내가 알고 있던 나는 꽤 오래된 버전이었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지금은 별로고, 예전에 괜찮던 방식이 지금은 버겁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옛 버전의 나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게 불편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업데이트가 안 된 채로 계속 쓰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일부러 나를 관찰한다. 거창하게 일기 쓰는 건 아니고, 그냥 하루를 보내면서 가끔 멈춘다. “지금 이거 하기 싫은 건지, 피곤한 건지.” “이건 진짜 싫은 건지, 그냥 귀찮은 건지.” 생각보다 구분이 어렵다. 예전에는 다 똑같이 참고 넘겼는데, 지금은 그 차이가 조금씩 느껴진다. 그게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신기한 건, 나를 보기 시작하니까 남들이 조금 덜 보인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비교가 자동이었는데, 요즘은 비교할 여력이 없다. 내 상태 파악하느라 바쁘다. 체력이 어떤지, 기분이 어떤지, 지금 속도가 맞는지. 남의 인생은 여전히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따라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은 이미 다른 코스를 달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다시 나를 바라본다’는 말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별거 없다. 나를 챙기기 시작했다는 말에 가깝다. 피곤하면 약속을 줄이고, 마음이 복잡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싫은 걸 억지로 좋다고 말하지 않는 정도다. 예전에는 이런 걸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관리라고 생각한다. 고장 나기 전에 점검하는 느낌이다.
가끔은 이런 변화가 낯설다. 예전의 나는 더 부지런했고, 더 참았고, 더 성실했다. 지금의 나는 조금 느슨해졌고, 조금 솔직해졌고, 조금 까다로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쪽이 더 나답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역할로 살았고, 지금은 사람으로 사는 느낌이다.
‘잘 살아온 걸까?’라는 질문에 나는 아직도 확답을 못 한다. 잘한 것도 있고, 놓친 것도 있고, 운 좋았던 것도 있고, 버틴 것도 있다. 다 합치면 그냥 ‘살아온’ 정도인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예전에는 잘 살았는지를 남에게 물었다면, 이제는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게 제일 큰 변화다.
나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인생이 갑자기 좋아진 건 아니다. 여전히 피곤하고, 여전히 걱정도 많고,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예전처럼 무작정 달리지는 않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속도만 내는 일은 줄었다. 가끔 멈춰서 방향을 보고, 나한테 맞는지 확인한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제야 나를 보기 시작했다. 잘 살았는지 따지기 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늦은 시작인지, 딱 맞는 타이밍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남의 인생 말고 내 인생을 기준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 하나만으로도 ‘잘 살아온 걸까?’라는 질문에 이전보다는 조금 덜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