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라는 이름의 설계도

우리는 왜 오래된 사유를 반복하는가

by Jwook

일을 하다 보면 늘 여러 개의 마감이 겹쳐온다. 보고서든 기획안이든, 우리는 늘 다음 판단을 재촉받는다. 그럴 때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꺼내는 말이 있다.

"이건 실무적으로 안 됩니다."


그 문장은 너무 익숙해서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문득 멈춰 서서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실무적 판단'이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세상에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 부르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복잡한 이론이나 철학적 사유보다는 데이터와 효율, 경험에서 길어 올린 상식을 더 신뢰한다. 특히 실무에 몸담은 사람들은 반복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단단히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이런 확신에 찬 태도를 20세기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단 한 문장으로 흔들어 놓는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실무자는 대부분 이미 고인이 된 경제학자의 노예다."

케인즈가 말한 '경제학자'는 좁은 의미의 학자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지배적이었던 사고방식, 그 당시의 합리성으로 포장되었던 이론 체계를 의미한다. 회사에도, 학교에도, 관공서에도 이런 보이지 않는 이론들이 있다. 우리가 '상식'이라 부르는 것의 상당수는 사실 누군가의 이론이 시간을 거쳐 굳어진 잔해다.


이 문장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온 판단들조차, 사실은 누군가가 오래전에 설계해 둔 생각의 틀 위에서 작동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론을 외면한 자의 역설


이론을 멀리한다고 해서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이론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상태야말로 가장 깊은 종속에 가깝다. 케인즈가 말한 '노예'란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자각 없는 반복. 출처를 모른 채 따르는 판단.


노예는 적어도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만들어놓았는지조차 모른 채, 그것을 자신의 판단이라 믿는다.


왜 우리는 성과를 말할 때 숫자로 표현 가능한 것들에 먼저 반응할까. 판매량, 조회수, 응답률 같은 지표들은 정말로 본질적으로 중요해서일까. 아니면 효율을 절대화했던 20세기 경영학의 유산이 아직도 우리의 판단을 이끌고 있기 때문일까.


측정 가능한 것만이 관리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것만이 가치 있다는 믿음. 우리는 그것을 상식처럼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 믿음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이론이 지배해 온 시간은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짧은 구간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짧은 시간의 이론이, 너무 빠르게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이런 질문들은 개인의 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속한 시대 자체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에피스테메,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감옥


에피스테메란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인식의 구조다. 무엇이 지식으로 인정받고, 무엇이 질문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무엇이 당연하게 전제되는가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


쉽게 말하면, 에피스테메는 생각의 틀이다.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틀 밖으로 나가는 질문 자체를 떠올리지 못한다.


왜 우리는 학교에서 지식을 국어, 수학, 과학, 사회로 나누는가. 지식이 원래 그런 방식으로 존재해서가 아니다. 19세기 근대 국가가 산업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지식을 분류했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왜 우리는 성공을 돈, 지위, 인정으로 측정하는가. 그것이 성공의 본질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기준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기준 안에서만 자신의 삶을 평가하도록 길들여졌다. 가족과의 시간, 내면의 평화, 타인과의 연결감 같은 것들은 성과 지표에 들어가지 않는다.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축과 도시 공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주하는 용적률과 건폐율, 각종 법규들은 그 자체로 에피스테메라기보다 제도적 규제에 가깝다. 그러나 이 법규들에는 공통된 전제가 깔려 있다. 공간은 측정 가능해야 하며, 기능에 따라 분류되고, 효율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믿음. 바로 이 근본적인 믿음이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다. 법규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 법규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고방식 자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기능이라는 이름의 독재


이 사유의 관성은 20세기 기능주의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선언했다. 한때 이것은 위생과 효율, 합리성을 통해 낡은 도시를 갱신하려는 혁명이었다. 문제는 기능 그 자체가 아니라, 기능이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굳어졌을 때 다른 질문들이 침묵하게 된다는 데 있다.


2025년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구도심에는 재개발 아파트와 주상복합이 빠르게 늘고 있다. 성냥갑 아파트로 상징되던 주거 환경은 녹지와 편의시설을 갖춘 또 다른 형태의 아파트 공화국으로 진화했다. 반면 단독주택 중심의 주거지는 점점 더 자본을 가진 이들의 선택지로 밀려난다. 우리는 주어진 효율적인 평면 한 칸을 얻기 위해, 삶의 많은 부분을 비용으로 지불한다.


이 변화는 도시의 풍경에서도 뚜렷하다. 대로변 한가운데, 주변 맥락과 무관하게 49층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이 우뚝 서 있다.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해법으로 선택된 이 형태는 도시의 랜드마크라기보다 묘한 위화감을 남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이런 풍경이 점점 표준이 되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건축만의 문제가 아니다. 업무 성과는 KPI로 측정되지만, 그 지표의 의미는 묻지 않는다. 교육은 점수로 평가되지만, 배움의 과정은 남지 않는다. 병원의 효율은 회전율로 계산되지만, 환자가 느끼는 존중과 안심은 수치 밖에 머문다. 기능은 강화되었지만, 의미는 자주 생략된다.


분위기를 묻는 건축


이 지점에서 이전 내 브런치 글에서 언급한 건축가 피터 줌토르의 작업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효율과 기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너머를 묻는다. 건물을 설계하기 전에 그는 장소의 기억과 소리, 빛의 움직임을 먼저 떠올린다.

스위스 발스의 온천에서 어둠과 물소리가 교차하는 순간, 독일 쾰른의 콜룸바 미술관에서 손끝에 전해지는 벽돌의 촉각. 이런 경험들은 제곱미터나 용적률로 환원될 수 없다. 줌토르에게 건축은 기계가 아니라 현상이며, 계산 이전에 감각이 존재한다.


물론 우리의 현실에서 줌토르와 같은 작업은 쉽지 않다. 그는 극소수의 예술가적 건축가이며, 대부분의 실무자는 예산과 법규, 일정이라는 냉정한 조건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이 태도는 기존의 이론을 버리라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이론과 규제가 가려버린 어떤 현실을, 다시 보라는 조용한 요청에 가깝다.


사유의 주권


나 역시 그동안 많은 판단을 관성적으로 내려 왔기에, 이 글은 타인을 향한 비판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향한 질문에 가깝다. 글을 쓰고 철학을 사유하는 행위는 나를 둘러싼 에피스테메를 인식하고, 내 판단의 뿌리를 의심하며, 사유의 주권을 조금씩 회복하려는 시도다. 사유의 지도를 직접 그리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남이 그려놓은 지도 안에서만 길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훨씬 좁다.


개인의 각성만으로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법규는 여전히 존재하고, 회사의 관행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우리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구조를 바꾸는 일도 결국 누군가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한 명이 묻고, 열 명이 묻고, 백 명이 물을 때,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그 순간, ‘이 판단은 정말 나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노예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어떤 틀 안에 놓여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판단은 이전보다 조금 더 정직해진다.


그리고 그 조금씩의 정직함이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질감이 달라진다. 사무실의 온도가, 가정의 분위기가, 거리의 속도가 조금씩 변한다. 측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삶을 바꾸는 그런 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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