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성은 언제 만들어지는가

차이의 숲에서 숨을 쉬는 법

by Jwook

나는 머리가 복잡해질 때마다 들뢰즈를 다시 펼친다. 『차이와 반복』과 『천 개의 고원』 속 낯선 개념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이해했다기보다는 생각이 느슨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개념 하나를 붙잡고 오래 머무르며, 지금 내가 막혀 있는 지점과 그의 사유를 나란히 놓아보는 시간.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 엉켜 있던 판단들이 조금씩 풀린다.


철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들뢰즈가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답을 주는 철학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빨리 굳어버리는 순간을 늦춰주는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불교 철학과 닮은 지점도 있어,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수행에 가까운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생각을 정리한다기보다, 생각이 스스로 가라앉는 시간에 가깝다.


일을 하다 예상치 못한 마감이 겹쳤을 때,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설명되지 않는 답답함이 남았을 때, 자녀 문제처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섰을 때, 나는 들뢰즈를 다시 소환해 읽는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선을 긋는다. 남과 여, 정상과 비정상, 효율과 비효율, 그리고 ‘나’와 ‘타자’. 이 견고한 경계들은 혼돈스러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관리의 편의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구분 뒤에는 거대한 함정이 숨어 있다. 바로 ‘동일한 기준이 먼저 존재하고, 차이는 그 기준에서 따라 차이가 생긴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흔히 본질(Identity)이 기원이라고 믿는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성격이다", "이 건축물은 본래 이런 용도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정해진 정답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질서와 관리를 위해 세워진 이 동일성의 벽들은 세계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인 우연, 생성, 그리고 예외를 포섭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복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말하는 차이는 정말 차이인가, 아니면 이미 설정된 동일성 안에서 허용된 ‘등급의 차이’일 뿐인가.


동일성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다


들뢰즈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정돈된 구조가 아니다. 세계는 본래 리좀(Rhizome)적이며, 끊임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생성의 흐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동일성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그 역동적인 흐름이 특정 조건에서 응결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건축으로 비유하자면, 동일성은 완성된 건물의 도면이 아니라 건물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점유하며 만들어진 '영토화(Territorialization)'의 흔적이다.


우리는 흔히 건물이 지어지기 전의 빈 땅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보지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그 땅은 수많은 바람의 길, 흙의 습도, 주변의 소음이 교차하는 '잠재성(Virtuality)의 장'이다.


동일성이라는 견고한 벽이 세워지는 순간, 그 수많은 가능성은 하나의 용도로 고착된다. 문제는 우리가 그 벽을 삶의 기원으로 착각할 때 발생한다. 기원으로 착각하는 순간, 건축물은 숨을 멈추고 우리는 그 안에 갇힌다.


잠재성은 가능성과 다르다


우리는 흔히 '잠재력'을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이미 지금 여기에 실재(Real)하는 힘이다.


그것은 마치 씨앗 속에 숨겨진 나무의 형상이 아니라, 수많은 유전자와 환경의 변수들이 충돌하며 매 순간 다른 모양의 가지를 뻗어 나가려 하는 에너지의 장과 같다.


동일성이 만들어지는 과정, 즉 '현실화(Actualization)'는 이미 정해진 설계도를 복제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장 안에서 서로 다른 차이들이 운동하고 충돌하며 매번 새로운 해답을 찾아가는 창조적 행위다.


따라서 동일성은 어제와 오늘의 나를 연결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다르게 반복되는 차이들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평형 상태일 뿐이다. 동일성을 악(惡)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영원불변한 본질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흐를 수 있는 '응결된 상태'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과정의 적분이다


이 사유를 주체로 가져오면 '나'라는 개념은 완전히 해체된다. 들뢰즈는 우리 안에 수많은 '애벌레-주체'들이 있다고 말한다. 의식에 포착되기 이전의 감각,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망설임들. 이것들은 미분된 상태의 나다.


우리가 "이게 나야"라고 부르는 의식적인 자아는 이 미분된 애벌레-주체들이 특정 국면에서 급격히 '적분'된 결과다.


우리는 늘 미분된 상태로 살아가다가, 사회적 요구와 결정, 마감 앞에서 빠르게 자신을 적분하여 '동일성'이라는 결과값을 내놓는다.


하지만 적분된 결과가 미분된 모든 순간을 대변할 수는 없다. 적분값 아래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미분된 떨림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를 다시 느슨하게 만들기 위하여


들뢰즈를 읽는다고 해서 복잡한 인생의 문제가 즉각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들뢰즈는 우리에게 '숨통'을 열어준다.


지금 나를 짓누르는 이 성격도, 내가 속한 조직의 답답한 질서도, 그리고 세상이 강요하는 정상성의 기준도 결코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언제나 사후적인 결과일 뿐이며, 우리 안의 잠재적 차이들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우리는 영토화된 자아에 안주하다가도, 언제든 탈주선(Line of Flight)을 그리며 새로운 생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마음이 복잡할 때 들뢰즈를 다시 펼치는 이유는 정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동일성의 벽에 갇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의 생각이 다시 흐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나’라는 건축물의 벽을 허무는 대신, 그 벽에 난 미세한 균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틈으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미분된 감각들이,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다.


어쩌면 동일성은 삶의 기원이 아니라, 긴 여정 끝에 잠시 머무는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정거장을 떠나 낯선 차이의 길 위에 설 때, 비로소 스스로에게 ‘살아 있음’의 떨림을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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