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생긴 공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말하지 않은 깨달음

by Jwook

완성된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사찰에 가면 대웅전 한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를 본다. 가장 높은 자리에, 가장 완성된 얼굴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아, 저 사람이 싯다르타(석가모니)였지. 수행 끝에 부처가 된 존재.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런 기대가 따라붙는다. 부처가 되기 전, 얼마나 치열하게 수행했는지, 어떤 번뇌를 끊어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해탈과 열반에 들었는지. 완성에 이르는 이야기. 우리는 그런 서사를 좋아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처음 읽을 때도 대부분 그 기대를 안고 들어간다. 그런데 읽다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부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부처가 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때 독자는 은근히 당황한다. 그래서 언제 깨닫는 거지? 이게 맞는 길인가?


부처를 만나고도 떠나는 사람


주인공 싯다르타는 부처를 만나고도 제자가 되지 않는다. 가르침을 존중하면서도 떠난다. 그는 고행의 길로 가지 않고, 금욕을 선택하지도 않으며, 교리를 암송하지도 않는다. 대신 삶 그 자체를 통과해 간다.


그는 사랑에 빠지고, 욕망을 경험하고, 상인이 되어 돈을 벌고, 도박에 빠지기도 한다. 한때는 모든 것을 잃고 강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뱃사공이 되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돕는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는 무언가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헤세는 그 이름조차 조심스럽게 피해간다.


이 소설은 깨달음에 도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깨달음을 기준으로 삶을 줄 세우지 않는 이야기다. 그 모든 우회와 실패와 늦음을 "잘못된 길"로 지워버리지 않는 이야기다.


손가락과 달 사이에서


불교에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킨다고 해서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 경전은 손가락이고, 말은 손가락이고, 수행법도 손가락이다. 깨달음은 달이다.


스님들은 이걸 모를까? 아니다. 다 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참선도 있고, 염불도 있고, 계율도 있다. 모두 방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손가락은 보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달을 보는 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깨달음은 정보가 아니라 상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글로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해도, 직접 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손에 잡힐 듯하다가 빠져나가고, 이해한 것 같으면 이미 어긋나 있다. 말과 문자로 포획되는 순간 이미 달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는 말보다 태도를 보고, 설명보다 삶을 본다. 그 사람이 어떻게 분노를 다루는지, 어떻게 집착을 내려놓는지, 어떻게 타인을 대하는지를 본다. 수행이 왜 지속이어야 하는지도 여기서 나온다. 깨달음은 단박에 올 수도 있고,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미묘한 역설에 빠진다. 어쩌면 수행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강하게 붙잡게 되는 것이 있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 부족하다"는 판단.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집착. 깨달음조차 목표가 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집착이 된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무언가를 하나의 기준으로 만드는 순간,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시간, 늦어지는 삶, 의심과 후회, 세속적인 기쁨과 슬픔, 애매한 상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 이것들은 조용히 밀려난다. '아직' 혹은 '아래'라는 이름으로.


아직 깨닫지 못한 삶은 미완이 되고, 중간에 머무는 사람은 부족한 존재가 된다.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에 이르지 못한 결핍 상태로 규정된다.


환원의 폭력


이 구조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하나로 정리하려 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효율적인 것과 비효율적인 것. 성숙한 태도와 미성숙한 태도. 올바른 선택과 그른 선택. 그렇게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순간,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것들이 생긴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 사람은 무책임한가, 용기 있는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은 자유로운가, 외로운가? 늦게 시작한 공부는 의미 있는가, 시간 낭비인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자꾸 하나의 답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답에 맞지 않는 삶을 배제한다.


불교가 스스로에게 "법도 버려라", "깨달음도 공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원의 폭력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깨달음이라는 궁극의 가치조차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노력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환원을 거부하는 소설


그래서 나는 헤세의 『싯다르타』를 불교 소설이 아니라 환원을 거부하는 소설로 읽는다. 이 소설의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 깨달음을 절대화하지 않게 된 인물에 가깝다. 그는 삶을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지 않는다.


그가 사랑했던 시간도, 탐욕에 빠졌던 순간도, 아들을 잃고 괴로워했던 날들도 모두 그의 삶이다. 그 어느 것도 "깨달음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각각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부처가 되지 못해도, 이 삶은 충분하지 않은가?


헤세는 불교를 이해한 뒤에야 가능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왜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하지?"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오히려 불교의 핵심에 닿는다. 집착하지 않는 것, 심지어 깨달음에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


마음에 생긴 공간


우리는 불교 수행자가 아니다. 매일 저마다의 일상 속을 살아가고 있고, 출가는 현실적이지 않으며, 열반을 삶의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구조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누군가를 너무 빨리 판단하지 않게 되고, 나 자신을 쉽게 탈락시키지 않게 된다. "아, 이건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문제구나" 하고 잠시 멈출 수 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덜 폭력적이 된다.


중간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것은 노력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도 이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면서도 계속 가는 것. 완성에 이르지 못한 채로도 충분히 살아가는 것. 그 앎이 오히려 삶을 더 진실하게 만든다.


그 멈춤이 마음에 생긴 공간이다.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깨달음을 기준으로 삶을 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세상을 조금 넓게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싯다르타』를 읽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처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조심스럽게 긍정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