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

자책 대신 구조를 보는 시간

by Jwook

이 말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자녀의 아픔 앞에서, 예기치 못한 실패 앞에서, 우리는 어느새 이미 닫힌 문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말은 사랑처럼 들리고, 책임감처럼 들린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동력이 아니라 누수다.


유능한 현장 소장은 도면을 붙잡고 울지 않는다


건물에 균열이 발견되었을 때, 유능한 현장 소장의 첫 질문은 하나다. "지금 이 구조에 어떤 하중이 걸려 있고, 무엇을 보강해야 하는가." 그는 설계자의 잘못을 탓하거나, 과거의 공정을 되짚으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균열 앞에서 그가 취하는 태도는 죄인의 고백이 아니라 엔지니어의 판단이다.


자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오해다. 균열이 생긴 건물을 앞에 두고 구조 점검 대신 과거의 도면을 찢으며 스스로를 벌하는 행위. 그것이 자책의 실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런 상태를 '수동적 정념'이라 불렀다. 쉽게 말하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다. 자책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괴로워지지만, 그 괴로움은 어떤 구조도 강화하지 못한다. 이미 폐쇄된 과거라는 공간으로 에너지를 계속 흘려보낼 뿐이다.


과거는 원인이 아니라 조건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보부아르는 인간의 삶을 '사태'와 '초월' 사이의 긴장으로 설명했다. 사태는 이미 결정되어 바꿀 수 없는 조건, 초월은 그 조건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능력이다. 우리가 흔히 자책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사태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다.


공사가 끝난 기초를 다시 파헤치며 울고 있는 것과 같다. 과거는 우리가 집을 지어야 할 대지일 뿐이다. 바꿀 수 없지만, 그 위에 어떤 구조를 세울지는 여전히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있다. 극단적인 자책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만에 가깝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말은,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전능감을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삶 전체를 설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책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가 나 중심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구조적 겸손이다.


눈물은 균열을 메우지 못한다


균열이 생긴 옹벽 앞에서 필요한 것은 후회가 아니다. 균열의 방향과 깊이를 분석하고, 하중의 흐름을 재설계하고, 적절한 보강재를 설치하는 일이다. 삶의 위기도 다르지 않다.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균열도 메울 수 없다.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지속적인 현존이다. 말이 끝난 자리에서 그냥 곁에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단단한 보강재다.


진정한 책임은 과거를 반복해서 고백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구조를 점검하고, 다음의 안정을 확보하는 결단 속에서 시작된다.


균열이 있는 자리에서


보강재가 설치된 벽은 균열이 있었던 자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가장 단단해진다.


자책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폐쇄된 공간을 떠나 현재의 공사 현장으로 돌아온다. 새벽 6시의 현장처럼,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계속 지어지고 있는 그 자리로.


완벽한 설계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물은 시간이 흐르며 균열을 경험한다. 중요한 것은 균열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강하느냐에 대한 선택이다. 삶은 완공된 건축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보수되고 강화되는 공사 현장에 가깝다.


균열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균열을 통해 더 단단한 구조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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