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와 괴롭다 사이의 거리

외벽이 바람을 대하는 태도

by Jwook

감각은 먼저 도착한다


겨울 아침, 현관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먼저 몸에 닿는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에 사람은 반사적으로 말한다. "춥다." 이 말에는 아직 불만도 의미도 없다. 그저 몸이 받아들인 상태에 대한 보고다.


감각은 언제나 생각보다 빠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는 곧바로 이유를 붙이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춥지, 왜 하필 오늘이지, 왜 늘 이럴까. 이 짧은 질문의 연쇄 속에서 감각은 정서가 되고, 현상은 고통으로 번역된다. 추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공기였는데, 어느새 하루 전체의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춥다'는 현상이고, '괴롭다'는 해석이다. 현상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만, 인간은 그 위에 의미를 덧붙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내 계획에는 이런 변수가 없어야 한다"는 고집이 쌓이면서 감각 위로 덧벽이 생긴다. 이 덧벽은 보호가 아니라 마찰을 만든다. 현실과 기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고통은 발생한다. 추위 자체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추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괴로움을 키운다.


외벽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건축에서 외벽은 내부와 외부가 처음 만나는 지점이다. 외벽의 두께는 마감재를 모두 합쳐도 400mm 안팎이다. 그중 콘크리트 구조체는 200mm 남짓. 이 얇은 막이 영하 15도의 바람과 영상 20도의 실내를 구분한다. 벽은 온도 차이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경계를 유지할 뿐이다.


서울 북촌의 한옥들은 300년째 북악의 바람을 받아내고 있다. 불평 없이, 그저 처마를 깊게 내밀어 대응할 뿐이다. 외벽은 바람을 막지만 바람과 다투지 않는다. 냉기를 느끼되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저 받아내고, 안쪽을 지킨다. 외벽의 역할은 세상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고, 경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


만약 벽이 스스로에게 감정을 부여한다면 어떨까. 왜 나는 북향에 세워졌는지, 왜 저 건물은 남향인데 나는 이 바람을 맞아야 하는지 묻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 건축은 구조물이 아니라 불만의 집합체가 된다.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불필요한 해석이다.


우리는 오늘 아침의 기온을 선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코트를 걸치고 창문을 닫고 있다.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과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조건 자체가 아니라,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옷을 껴입는다는 것


현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과정은 단순하다. 지금의 상태를 본다. 지금은 춥다. 판단을 잠시 멈춘다. 이 추위가 곧 내 삶의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옷을 한 벌 더 입는다. 이 단순한 순서가 괴로움의 회로를 끊는다.


여기서 '옷'은 단순한 보온이 아니다. 어떤 날의 옷은 말 한마디를 줄이는 일일 수 있고, 어떤 날에는 하루를 견디기 위한 규칙 하나일 수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 일정에서 하나를 덜어내는 결단, 감정이 격해질 때 자리를 잠시 피하는 선택 역시 옷이다.


옷을 껴입는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선택이다. 세상의 온도를 바꿀 수는 없지만, 내가 입을 옷은 선택할 수 있다.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하루를 만들고, 하루가 모여 한 계절을 통과한다.


외벽처럼 산다는 것


외벽처럼 산다는 것은 무감각해지는 일이 아니다. 바람을 느끼되, 바람과 동일시하지 않는 일이다. 감각은 받아들이되, 불필요한 해석으로 키우지 않는 태도다. 그리고 가능한 만큼 옷을 챙겨 입는 일이다.


삶에도 예고 없이 추운 계절이 찾아온다. 승진 탈락 통보, 검진 결과지의 낯선 용어, 단체 채팅방에서 나만 빠진 모임 사진 같은 것들이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왜 나에게, 왜 하필 지금. 그러나 그 질문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집에는 덧벽이 쌓인다. 벽을 두껍게 쌓는 대신, 불필요한 덧벽부터 걷어내야 한다. 현실을 바꾸는 일과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은 다르다. 전자는 어렵지만, 후자는 지금 당장 가능하다.


'춥다'와 '괴롭다' 사이에는 아주 얇은 틈이 있다. 그 틈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이라는 집은 혹한기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평온은 세상이 따뜻해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어디까지 덧붙이느냐에 따라 유지된다.


내일 아침도 여전히 추울 것이다. 다만 그 추위가 곧바로 괴로움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문을 열고, 공기를 맞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옷을 한 벌 더 입을 수 있다. 그렇게 오늘을 통과하는 동안, 외벽은 조용히 제 일을 한다. 바람을 원망하지 않고, 안쪽을 지키는 일.


외벽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선택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200mm의 두께로 온도의 경계를 유지하고, 처마를 내밀어 빗물의 방향을 바꾸고, 단열재를 품어 냉기를 완화한다. 불평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묵묵히 제 기능을 다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작동할 수 있다. 조건을 선택할 수는 없어도, 조건 안에서 대응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감각과 해석 사이, 현상과 고통 사이, 춥다와 괴롭다 사이. 그 얇은 틈에서 우리는 옷을 고를 수 있다. 바람은 여전히 불겠지만, 우리에겐 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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