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이 책상을 떠난 이유
나는 계획을 세우는 일을 좋아한다. 노트에 생각을 정리하고, 책에서 읽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삶을 더 잘 살기 위한 구조를 머릿속에서 설계해본다. 어떤 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추게 된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고 난 뒤, 사랑에 관한 책을 수십 권 읽은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멍해지는 그 순간.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그때서야 다시 실감한다.
우리는 정보를 얻는 순간 그것을 이미 실현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통찰을 얻으면 마치 삶의 문제가 조금 해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진다. 아직 자신도 살아내지 못한 지혜를, 마치 이미 체득한 것처럼 건네면서.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설계도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
건축에서 아무리 정밀한 청사진이 있어도 그것을 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설계도는 건물을 짓기 위한 약속일 뿐, 그 자체가 사람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다. 삶의 지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철학과 지식은 인생이라는 대지 위에 세울 집의 도면과 같다. 하지만 도면만 계속 수정하는 사람은 결국 어디에도 살아가지 못한다.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세계의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계를 완전히 언어 안에 담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 믿음을 뒤집었다.
후기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어의 의미는 정의가 아니라 사용에 있다고. 단어는 사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쓰는 삶의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고.
그가 말한 "삶의 형식(Lebensform)"은 이것이다. 언어는 삶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될 때만 살아 있다. 설계도가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이 되어야 비로소 건축이 완성되듯, 지식도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할 때만 의미가 생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 간극을 몸으로 살았다. 그는 철학을 중단하고 시골 학교 교사가 되었고, 병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사유를 삶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일이 무엇인지, 그는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배우려 했다. 그 전환이 어떤 것인지, 나는 엉뚱한 곳에서 배웠다.
건축 현장은 도면과 다르다. 선들이 그토록 깔끔하게 정렬된 청사진과 달리, 현장에는 잘라낸 자재 끄트머리가 흩어져 있고 미장을 마친 벽면에는 손자국과 얼룩이 남는다. 그래서 건축법은 도면과 실재 사이의 오차를 법적으로 허용한다. 설계도처럼 완벽하게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법이 먼저 알고 있는 셈이다. 집은 그 지저분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지어진다.
삶도 다르지 않다. 아는 대로 살려고 하면 수많은 습관과 욕망이 저항한다. 화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나고, 차분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쉽게 흔들린다.
나 역시 오래 설계도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더 나은 도면을 얻으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정작 벽돌 한 장 쌓지 않았다. 하지만 집은 생각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벽돌을 쌓는 손의 반복 속에서, 그 지저분하고 느린 과정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완성된다.
삶의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해는 출발점일 뿐, 목적지가 아니다. 무엇을 더 잘하려 애쓰기보다, 지금 내가 어떤 구조 위에 서 있는지를 차분히 바라보고 작은 행동 하나를 바꾸는 것. 도면을 한 번 더 수정하는 대신 망치를 드는 것. 그것이 삶을 다시 짓는 시작일지 모른다.
지식은 쓰여야 살고, 사람은 행해야 바뀐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는 사용 속에서만 산다고 했을 때, 그것은 삶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설계도는 종이 위에 있지만, 집은 언제나 삶 속에서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