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되지 않은 채로 다음 문장을 기다리는 법
어떤 사건은 설명 없이 도착한다. 예고 없이, 복선 없이, 어떤 서사적 준비도 없이. 그리고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유를 찾는 것이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지금이었을까.
이 질문은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 답해져야 한다는 믿음은 생각보다 훨씬 최근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터 삶에 개연성을 요구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걸까.
2024년 봄,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는 폐차했고, 나는 일주일가량 병원에 입원했다.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음악을 틀고 천천히 달리던 중이었다. 그때 어떤 차가 갑자기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에어백이 터지는 순간, 시간이 일시 정지된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소리도, 통증도, 다음 생각도 없었다. 그냥 — 공백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상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면 충돌. 차는 뒤로 밀렸고, 나는 병실에 눕게 되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그 질문이 다시 도착했다. 이번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왜 하필 나였을까, 왜 지금이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 차는 무면허 음주운전 차량이었다. 보험은 내 것으로 감당했고, 형사합의조차 없었다. 억울함과 황당함이 뒤섞였지만, 그럼에도 그 사고에는 인생 서사로서의 개연성이 없었다. 어떤 전조도, 어떤 복선도 없이, 불현듯 설명 없이 사건은 도착했다.
퇴원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워크샵 가는 길에 탄 관광버스가 고속도로에서 앞 차량을 들이받았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돌아왔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버스 안 사람들 모두 같은 충격을 받았고, 앞차의 뒷 범퍼는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안에서 당하면서 밖을 보는 자리. 처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건은 또 도착했다.
몇 달 사이에 두 번.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 파일을, 주변 물건들을 정리해두어야겠다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간격이었고, 만약의 상황을 한 번쯤은 생각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 번이면 불운이다. 그러나 두 번이면 우리는 패턴을 찾기 시작한다. 의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인과를 향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삶에서는 그 본능이 당연한데, 허구에서는 그것이 결함이 된다. 동기는 분명해야 하고, 사건은 설명 가능해야 하며, 결말은 납득되어야 한다. 독자는 말한다. "이건 개연성이 없어." 그런데 삶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고는 이유 없이 발생하고, 어떤 고통은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유를 찾는다. 설명은 위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온 가장 오래된 자리에서도 사건은 설명 없이 도착했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신들의 변덕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의미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야기의 원형들 안에서 운명은 언제나 이해보다 먼저였다. 근대 소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인과의 언어를 채택했고, 우리는 현실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허구에서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 가능한 세계를.
납득되지 않는 허구를 비판할 때, 우리는 사실 납득되지 않는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과라고 부르는 것은 애초에 어디서 오는가. 흄은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는 것이 반복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습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불교의 연기론은 다른 출발점에서 비슷한 곳에 도달한다.
모든 존재는 고정된 원인 없이 조건들의 일시적 집합으로 발생하며, 그 집합이 흩어지면 존재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두 사유가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 인과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인과를 만드는 행위가 거짓이라 해도, 우리는 진실만으로 살지 않는다. 생존에는 때로 진실보다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일련의 사건들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둔해진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방식으로.
사고 이후 나는 이런 생각을 붙잡았다. 상대 차가 내 앞 범퍼를 대각으로 받았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차는 그대로 인도로 뛰어들었을 것이고, 보행자가 있었다면 더 큰 사고가 났을 것이다. 나는 희생해서 더 큰 사고를 막은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나를 견디게 만들었다.
건축으로 말하자면, 인과는 구조가 아니라 마감재다. 실제 하중을 버티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기둥이지만, 우리가 그 공간을 살 만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벽의 질감이고 빛의 각도다. 인과는 사건을 해명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그 사건 안에 머물 수 있게 해준다. 인과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를 견디게 한다.
마감재가 공간을 살 만하게 만든다면, 자유로운 평면은 공간을 가능성으로 만든다. 완성되지 않은 공간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감각이 있다. 아직 칸막이가 없고, 아직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무엇이 될지 모른다는 그 감각이, 불안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한 자유로운 평면은 그 감각을 건축의 원리로 삼은 것이다. 칸막이가 세워지기 전, 기능이 고정되기 전, 그 유동하는 상태 안에 공간의 잠재성이 있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직 인과가 도착하지 않은 사건, 아직 의미가 굳어지지 않은 경험. 설명이 닫히기 전의 시간은 불안하지만, 동시에 열려 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나는 한동안 사고 현장 근처를 지나치기 어려웠는데,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그 길을 지나쳤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무런 서사적 전환도 없이, 어떤 극적인 결심도 없이, 그냥 — 통과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회복도 사건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준비가 끝나서가 아니라, 그냥 — 어느 날. 의미는 나중에 붙었고, 사건은 언제나 의미보다 먼저였다.
인과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로 다음 문장을 기다리는 시간. 설명 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그 감각이, 어쩌면 삶이 허락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일지 모른다. 그리고 견디는 힘 없이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