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결말을 거부하는 자들
태초에 두 존재가 있었다. 하나는 씨앗을 뿌리는 자였다. 그는 같은 땅에서도 전혀 다른 풍경이 피어나기를 원했다. 실패할 씨앗조차 생명의 일부라 여겼고, 다양성이 사라지는 순간 세계는 풍요롭지 않고 단지 효율적인 것이 된다고 믿었다.
다른 하나는 살아남을 것을 가르는 자였다. 그는 결과만이 의미 있다고 믿었다. 사라진 것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아니었고, 살아남은 것이 곧 정당한 것이라고.
그들은 수없이 많은 우주를 함께 시뮬레이션했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 시작해도, 어떤 씨앗을 뿌려도 — 결과는 늘 같았다. 가장 강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인 하나의 형태가 모든 것을 삼켰다.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비효율은 제거되었고, 정원은 오직 최적화된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했다.
가르는 자는 그것을 완성이라 불렀다. 씨앗을 뿌리는 자는 그것을 실패라 불렀다.
씨앗을 뿌리는 자가 물었다.
규칙이 변하지 않는 한 결과도 바뀌지 않는다면 — 다시 씨앗을 뿌릴 이유가 무엇인가.
가르는 자가 답했다. 살아남지 못한 가능성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아니었다.
이 논쟁에 틀린 쪽이 있는가.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 앞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가르는 자의 논리는 냉혹하지만 일관된다. 씨앗을 뿌리는 자의 믿음은 아름답지만 반복적으로 패배한다. 그리고 이 구도가 우화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았다.
진화가 이 구조를 쓴다. 시장이 이 구조를 쓴다. 우리가 살아가는 조직과 관계 또한 조용히 이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도시는 가장 비싼 땅 위에 가장 높은 건물을 세우며 이 구조를 모방하고, 시장은 가장 빠른 자에게 모든 파이를 몰아주며 이를 정의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 결말은 예정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했을 뿐인가.
이 우화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씨앗을 뿌리는 자는 결국 금기를 선택했다. 관찰자로 남는 대신, 스스로 규칙이 되기로 했다. 규칙을 만드는 자가 그 규칙에 개입하는 것 — 그것이 자신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질서를 배반하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힘을 수많은 문명에 나누어주었다. 어떤 문명은 그 힘으로 황금기를 열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예술이 꽃피고, 생명이 번성했다.
그러나 그 문명은 점점 불안해졌다. 가능성은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도 포함했다.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 문명은 스스로 확실성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스스로 벽을 세우고 그 안에 갇히기를 자처했다. 수백만의 목소리가 하나의 목소리가 되었고, 하나의 의지가 되었으며, 결국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빛에서 태어난 문명이, 가르는 자의 논리로 세계를 완성하려는 괴물이 되었다.
선한 의지가 폭력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나 같다. 공포를 견디지 못한 확신이, 타인의 선택을 지울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때다.
다양성을 통일로 해결하려는 순간, 구원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선택을 삭제하려는 순간이다.
역사는 이 패턴을 반복해서 증명해왔다. 해방을 외친 자리에서 숙청이 자라났고, 평등을 꿈꾼 손으로 새로운 감옥이 세워졌다. 선한 의지는 언제나 그 출발점에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어긋났다. 확신이 깊어질수록, 자신은 옳고 타인은 수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문명이 괴물이 된 것은 어둠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 안의 두려움을 끝내 직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칼 융은 말했다. 의식하지 못한 것은 삶을 지배하며,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고. 우리 안에는 그림자가 있다.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판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밀어낸 모든 생각들.
그것은 제거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되지 않을수록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불확실성을 외면할수록 그것은 더 거대한 확신이라는 괴물이 되어 돌아왔고, 결국 세계를 단 하나의 평면으로 박제하려는 의지가 되었다.
융이 제안한 것은 제거가 아니었다. 직면이었다. 내 설계도에 없는 빈 공간을 인정하는 일, 내 안의 어둠을 방 한 칸으로 내어주는 일이다. 내 안의 어둠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의 어둠을 괴물이라 부르는 일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묻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그 선택을 했는가. 나라면 달랐을까.
우리는 매일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깨어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는 미세한 균열이 있다. 나는 옳다고 믿었던 선택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순간 처음으로 경계가 보였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었다. 확신과 외면의 문제였다.
선택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어둠을 손에 쥔 채 선을 지키는 것은 가능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게 된다.
선한 의지는 언제 폭력이 되는가.
사유는 언제나 그 경계 위에서 시작된다.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은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을 허물고 그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일이다.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 결과를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는 것. 그 조건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어떤 삶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정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