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실한 상담자, 대나무 숲이라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역할을 못하는 리스너는 아니었다. 호들갑스러운 반문/호응보다 무슨 얘기든 잘 놀라지 않고 그 일이 존재함과 상대의 반응이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그런 지점에서 성실한 내담자이자 청취자였고, 너 자신을 잘 챙기란 말을 곧잘 하는 나였다.
언젠가부터 내 고독과 공허보다 주변의 일들이 깊고 기구한 사연들이 많아 보였고, 말을 뱉기보다 삼키는 일이 많아졌다. 상견례 자리에서 식장을 성당으로 툭 던지던 신부집에 결혼 뒤엎으려던 절친, 남자 친구를 반대해 매일 밤 엄마와 본인 서로 이불속에서 우는 학교 선배 이야기, 사표 쓴 뒤 8년 동안 간간이 파트타이머로 지내는 또 다른 선배, 고시 10년 차에 녹내장으로 급작스럽게 취업하게 된 유쾌하던 형, 애인의 3류 야설만도 못한 배신에 무너져 내린 친구. 나이 들고 이제 아픈 곳이 많아지는 걱정 많은 엄마. 남자 애가 둘이 되어버린 사촌동생.
말을 꺼내기도, 기껏 말을 꺼내봤자 내가 더 힘들다는 말을 듣거나 다 아는 잔소리와 같은 염려를 듣는 일이 대부분인. 결국은 말을 삼키는 편이 나았고 나는 점점 더 그렇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나를 지키기 위해, 무너지지 않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눈을 나 안으로 돌려 나를 옹호하고 불쌍히 여기며, 밖에 사연들에 향해있던 그것을 내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힘이 되었다. 남이 안아주고 알아줄 리 없는 풍파에 쓸리고 상처 받은 내 마음 나무의 가지를 혼자 오롯이 끌어안고 옹호하는 일은 상처가 곪아 터지는 것을 막는 일처럼 보였다. 나를 지키는 일. 나는 상처 받은 것들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고 그것들의 불합리와 동의할 수 없음을 생각하며 자신을 옹호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를 이유로 밖으로 내 팔과 몸, 입을 멋대로 흔들거나 밖에 소리를 뱉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샌가 나는 바닷물을 마시는 나무가 됐다.
나를 옹호하기 위해 나 안에 집중해가는 일은 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난 물을 다시 내게 붓는 일이 지속될수록 나는 외부에서 부는 세찬 바람에 버틸 힘이 생겨갔지만, 반면에 나의 색과 농도를 짙어져가게 했다. 흐르지 않고 머물고 남과 섞이지 않는 물은 진해져 가 소금 같은 농도로 나와 주변을 황폐하기 만들었다. 나무가 되겠다던 나는 앙상하게 마른 가지를 가진 바닷물 마신 나무, 내가 선 곳은 진한 내 색깔에 새들도 지쳐 날아가는 땅이 되었다.
물은 고여있을 수 있었고, 나를 옹호하는 일은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흘러 머물지 않고 밖으로 흘러야 하는 거였다. 내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 만든 물과 섞여 흘러야 했고 나는 그렇게 섞인물을 마셔야 했다. 내 우물만을 마신 한참 후에 내 나무가 마르고 황폐해진 주변을 마주하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