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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Dec 04. 2021

아오지까지_미리읽기

세 번 탈북한 소년의 나라

조경일 작가가 쓴 <아오지까지: 세 번 탈북한 소년의 나라>라는 책이 곧 나옵니다. 재미있습니다. 애처로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그러나 따뜻합니다. 푸르릅니다.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었고,

44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어요.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3개의 장에서 하나씩 미리 읽기로 공개합니다.


제1장은 세 번에 걸친 탈북 이야기예요. 실화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드라마입니다. 그중 첫 번째 탈북을 한 다음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신분을 감춘 뒤 중국 초등학교 생활을 하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된 이야기를 미리 읽기로 소개합니다. 제목은 <북송>입니다.



2002년 4월 26일 오후. 음악 시간이었다. 리코더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음계에 맞춰 리코더를 불었다. 한창 수업 중에 누군가 불러서 담임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한참 있다가 교실 문이 열리더니 담임 선생님이 내게 손님이 찾아왔다고 나오라고 말했다. 내게 찾아올 손님이 없는데 말이다. 나는 전도사 님이 찾아왔나 싶었다. 역시 전도사 님이 밖에 서 있있다. 그런데 전도사 님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차렷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공안차 두 대가 서 있었고 중국 공안 서너 명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오라고 손짓했다. 함께 다니던 세 명의 친구들도 불려 나왔다. 우리는 수업 중에 그대로 중국 도문감옥으로 끌려갔다. 옷가지 하나 없이 반바지 차림이었다. 누군가 신고 한 게 분명했다. 보통 중국은 아이가 한 명인데 우리는 고아에 두 명이었고 네 명이 한집에 같이 살았으니 의심쩍었을 것이다.


감옥은 하얀 타일 바닥에 수세식 변기가 구석에 놓인 열 평 정도의 크기였다. 가로세로 30센티 정도되는 하나뿐인 창문으로 햇볕이 들어왔다. ‘경일이’도 함께 수감됐다. 어른들이 열 명 정도 있었다. 우리가 제일 어렸다. 수업 중에 잡혀 와서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4월은 여전히 추웠다. 감옥 안에는 이불이 부족해서 어린 나는 어른들 틈에 끼여서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38일 동안 같은 옷을 입었다. 이불과 몸에는 이가 가득했다. 중국 공안들은 우리를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빵 한 조각에 국물 한 국자로 끼니를 채우게 했다. 방에는 온몸이 시커멓게 멍든 아저씨가 있었다. 취조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자 공안견에게 물리게 했다고 말했다. 공안들이 때리고 개가 물어서 몸이 멍으로 가득했다.


 38일 동안 운동도 시켜주지 않았으므로 줄곧 방 안에만 갇혀 있었다. 해가 뜨는 날에는 돌아가며 창문 아래에 서서 햇볕을 쬐는 풍경이 매일 반복됐다. 어린 꼬마인 우리들은 어른들이 다 쬐고 난 뒤에야 기회를 얻었다. 하루 중에 이때가 유일하게 기쁜 시간이었다. 높기만 한 창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햇살 너머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 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한 달이 넘도록 방에만 갇혀 있다보니 내 얼굴은 창백해지고 기력도 빠져서 영양실조에 가까워졌다. ‘중국놈’들은 정말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38일째 되던 날 감방 문이 열렸고 함경북도 온성으로 북송될 순서를 기다렸다. 수갑 하나로 한 팔씩 두 명을 채웠다. 어린아이가 여럿 있었는데 나만 수갑을 채웠다. 차를 타고 국경 다리를 지나 온성 보위부에 인계되었다. 보위부는 가난해서 수갑도 부족했다. 각자 신발끈 하나씩 풀게 해서 수갑 대신 묶었다. 우리는 보위부 감옥으로 끌려갔다. 정사각 형의 7평 남짓한 공간에 50명 정도 앉아 있었다. 서로 온몸을 비비듯 붙어야 겨우 앉아 있을 정도였다. 숨이 찼다. 사흘 동안 취조 받은 뒤 청진 꽃제비 시설로 보내졌다가 집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2년 만에 아빠를 만났다. 철창살 안팎에서 마주한 아빠 얼굴은 초라하면서도 따뜻함이 풍겼다.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아빠는 내 손을 꼭 잡고 말없이 걷기만 했다.




제2장은 조경일 작가의 대한민국에서의 성장기와 삶이 그려져 있어요. 저자는 열일곱 살에 대한민국에 들어왔어요. 세상에 둘도 없는 약자였던 저자가 결심합니다. 타인의 도움 덕분에 덤으로 인생을 살게 됐으므로 자신도 약자를 돕는 인생을 살겠노라고요. 또한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에도 기여하고 싶다고요. 그 얘기를 듣던 대학생 선배(탈북민을 돕던 대학생)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라고 조언합니다. 그 조언에 따라 저자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공부한 후에 국회에서 일하게 됩니다. 제2장은 그런 과정이 그려져 있어요. 15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한 개를 소개합니다. <나는 왜 민주당인가>라는 제목입니다. 매우 쓸쓸한 마음이 전해집니다.  



내가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한다고 말하면 주변에서 놀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왜 하필 민주당? 의외라는 반응이다. 그럴 때마다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색하다.


탈북민들은 대체로 정치성향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처럼 글을 쓰면서 자기 정치적인 생각을 밝히거나 국회라는 정치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반대로 정치성향을 표현하는 탈북민 중에는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탈북민 사회에서 이단아에 가깝게 취급될 때도 있다. 이북에서 온 사람들에게서조차 어떻게 민주당을 지지할 수가 있느냐고, 간첩이 아니냐고, 그럴 거면 왜 탈북했느냐는 질문까지 받았던 적이 있다. 그만큼 탈북민 사회에서 민주당은 탈북민이 기웃거릴 공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평범한 한국 사람들조차 탈북민은 모두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로 탈북민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성향이다. 탈북민들의 상당수는 그런 보수성향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이나 취업 같은 도움을 받는다. ‘줄을 잘 서야 된다’는 세간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내가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던진다. 왜 민주당이냐고, 한국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고. 민주당이 아니라면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민주당만 아니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연결해 주겠다거나 추천해 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내가 보수정당을 택했다면 어쩌면 이력서를 붙들고 그렇게나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민주당을 택했고, 그런 선택이 어렵지도 않았다. 그래도 탈북민이 민주당에서 버텨 내는 건 외롭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민주당이나 진보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까지는 관심보다는 신기해한다. 내 처지라는 게 이렇다. 나는 북에서 왔지만 빨갱이는 아니라는 ‘인정투쟁’을 해야 하고, 동시에 보수 쪽 사람들에게는 나는 민주당에서 일하는 탈북자지만 빨갱이는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약자 편이다. 내가 천하의 약자였으니까.


동병상련하는 마음으로 약자 편을 드는 진보적 어젠다에 이끌렸다. 대학생 시절부터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그랬다. 당시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정치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사회를 배워 나갔다. 나는 그들의 이 야기를 경청했고 그들이 말하려고 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불안한 일자리에서 언제 해고될지 몰라 걱정하는 사람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 비정규직이어서 하청노동자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 먹고살 걱정이 막막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하소연할 데 없어서 1인 시위라도 하는 사람들, 불안한 남북갈등 말고 평화적 교류를 바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잘 듣는 쪽이 민주당이었고 진보 쪽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거기에 섰다. 보수든 진보든 통일을 원한다. 하지만 같은 목적지를 가는 방법이 사뭇 달랐다. 나는 여전히 고향에 돌아가는 꿈이 있는데, 대결보다는 교류를, 더 강한 제재보다는 더 강한 협력으로 평화통일에 힘쓰려는 사람들 쪽에서 내 꿈을 키워 가고 싶었다.


이북에 머물던 소년 시절 나는 장마당을 다니며 ‘대한적십자사’, ‘유엔’이라고 적힌 쌀 마대를 자연스레 목격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들여온 옥수수를 배급으로 받아 오면 행복해하곤 했다. 알맹이가 손톱만큼 눈알만큼 컸다. 옥수수와 쌀이 미국에서 들어왔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진다. 그러고 나서 조금 지나면 한동안 받지 못했던 배급을 받는 것이다. 덕분에 식량 가격도 조금 낮아져서 시장에서 평소보다 싸게 식량을 구할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 대부분이 인도주의 목적으로 북한에 보내진 식량이었다. 이런 인도적인 지원은 인도적인 수혜를 낳는다. 그런 수혜를 직접 체험한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북으로 쌀을 보내면 군인들과 관료들만 그 쌀을 먹는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나도 안다. 정치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소위 민주 진영과 보수 진영의 차이점이 이 부분에서 갈라지는 것 같았다. 군인도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혈기가 왕성해서 허기를 더 느끼는 나이의 사람들이다. 좋은 쌀을 군인들이 먼저 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 덕분에 어딘가에 묵혀 둔 쌀이 시장에 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내 이력서에는 ‘기독교’ 그리고 ‘통일 활동’이라는 단어가 적힌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내 인생에서 신앙심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내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꿈이 있다. 그 꿈을 위해서라도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탈북자가 기독교와 통일 활동이라니, ‘빼박’으로 보수파라는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이번에는 민주당 쪽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애써 증명해야 했다.


내가 어째서 민주당을 선택했는지 민주당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민주당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설명해야 하는 상황, 이게 내 처지다.



제3장 <마음의 벽을 허물어 봐요>는 탈북민의 번뇌와 생각이 묻어나는 글들이 묶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그 고난의 시기에서도 희망을 좇고 잘해야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는 탈북민 소년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타자 연습>입니다.


처음 탈북하기 전까지 북에서는 컴퓨터를 알지 못했다. 중국에서 그 신기한 것을 처음 봤다. 2년 후 북송돼서 다시 중학생으로 북한 생활을 하게 됐을 때 학교에서 컴퓨터 수업이 있었지만 컴퓨터를 만지고 하는 수업은 아니었다. 첫 번째 탈북 후 중국 연길에서 생활한 선교사 집에는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 그러나 그 컴퓨터를 사용하지는 못했다. 컴퓨터가 있는 선교사님 방은 거의 출입금지였기 때문이다. 딱 하루 전원이 꺼져 있는 컴퓨터 키보드를 만져 본 게 전부 다. 키보드를 쳐봤다. 굉장히 신기했다. 그때가 2001년 즈음이다.


그 후로 나는 자꾸 그 컴퓨터 키보드를 생각했다. 세 번째 탈북해서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나는 마치 피아노를 치듯 습관적으로 손가락 연습을 했다. 한국에 가면 컴퓨터를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타자를 잘 치려면 손가락이 부드러워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직 키보드의 세세한 위치도 몰랐다. 그저 손가락을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탈북 여정 동안 앉아서 쉴 때마다 틈틈이 무릎에 대고 타자 치는 연습을 하곤 했다. 가끔 사람들이 내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곤 했다. 마치 수전증이 있는 사람처럼 열 손가락을 무릎에 대고 움직여 대니 이상했을 게다. 가끔 피아노가 있는 거처에 들르면 건반을 컴퓨터 키보드라고 생각하면서 눌러보기도 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았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독방에서 혼자 지내게 한다. 철저히 조사하기 위함이다. 매일 똑같은 자필 진술서를 썼다. 한 2평 정도 되는 작은 방에 1인용 간이 침대 하나와 조사관 책상이 전부다. 조사관 책상 위에는 무려 컴퓨터가 있다! 조사관이 들어와 서 컴퓨터를 켜고 나를 심문했다. 이것저것 묻는다. 나는 대답하고 다시 자필로 써냈다. 그날의 심문이 끝나면 조사관이 나간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조사관 컴퓨터 앞으로 가서 앉았다. 컴퓨터를 켤 줄도 몰랐다. 그저 컴퓨터 키보드를 만지고 싶었다. 그동안 한국으로 오면서 연습했던 손가락 열 개의 유연성을 테스트해 보고 싶기도 했다. 처음으로 키보드에 적혀 있는 한글 모음과 자음의 위치를 봤다. 양손 검지를 중심 자리에 위치시켜 놓고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자음과 모음 자리 연습을 했다. 매일 반복했다. 조사관이 없는 작은 방에서 할 수 있는 건 전원도 안 켜진 컴퓨터 키보드를 만지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빨리 나가서 타자를 마음껏 쳐보고 싶었다. 컴퓨터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설렜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고 웃기는 일이다. 분명 그 방에는 CCTV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국정원 사람들은 다 봤을 것이다. 조사관이 나가자마자 조사관 자리를 두리번거리면서 꺼져 있는 컴퓨터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독방에서 조사를 받는 며칠 동안 내내 나는 그런 짓을 했다. 손가락이 굳지 않도록 잘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정원 조사를 마친 후 ‘하나원’으로 이동했다.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는 방법을 익히는 교육 시설인 하나원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윈도우 버튼의 기능과 인터넷 익스플로어 사용법, 이메일을 만드는 법 등 아주 기초적인 교육부터 시작했다. 컴퓨터 수업 시간의 가장 핫한 주제는 타자 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타자를 잘 칠수록 상금이 컸다. 목표 타자 속도 100을 넘기면 플로피 디스크를 하나 받았다. 2004년에는 16메가 용량인 플로피 디스크가 대중적으로 사용됐다. 200타를 치면 플로피 디스크를 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하나원을 나올 때에는 300타를 넘기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플로피 디스크 묶음을 받아 들고 하나원을 졸업했다.



드디어 출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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