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가 멸망한 세 가지 이유
한국의 진보는 멸망했다. 멸망이라니, 이런 표현이 거슬린다면 이렇게 말을 바꿀 수도 있다. 멸망 직전에 다다른 한국의 진보는 머지않아 자연사한다. 첫째, 제시할 비전이 없기 때문에 진보는 멸망했다. 둘째 지성 대신 계산기를 택했기 때문에 망했다. 셋째 높은 이성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거대한 감정집단으로 결속해 있기 때문에 수명이 다했다.
본인이 진보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신, 완전 꼴보수잖아요?”라고 말하면 인신공격으로 여긴다. 스스로를 온건한 보수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어머나, 어디 그런 좌빨 생각을 하셔?”라고 대꾸하면 모욕감을 준다. 그러므로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지 정의해 둘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또 쉽지 않다. 우선 진보와 보수의 개념 정립 자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똑 부러지게 정해지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다르고 지역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양쪽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만한 수준으로 이걸 제대로 정의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진보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기로 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자기 필요에 따라, ‘진보’라고 표현한 낱말을 마음대로 ‘보수’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어떤 정당을 겨누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진보’라고 지칭하는 세력은 특정 정당이라기보다는 <본인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적당할 것 같다. 어쩌면 나를 포함해서.
진보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한다는 명목으로 ‘살아남기 위해’ 거대담론을 버렸다. <거대담론>. 거대담론은 사회를 지배하는 포괄적인 신화, 인간 역사의 신화를 뜻한다. 두 가지가 특징적인 요소가 있다. 사회 전반의 문제점들을 관통하는 커다란 원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회가 가야 하는 커다란 목표에 관한 이야기. 인간사회에 대한 커다란 생각과 큰 비전이 담겨 있는 이야기, 그것이 거대담론이다. <큰 생각>이라고 바꿔 표현한다.
일제의 침략에 의해 지배된 식민시대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독립과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 <큰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때의 거대담론이었다. 우리는 그 시절의 거대담론 신화를 안다. 한국은 지독한 군사독재 국가였고, 불과 40년 전만 해도 끔찍한 사회였다. 그런 시절에 독재타도를 외치며 헌법정신을 실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이상주의자들의 신화가 있었다. 그것이 당시의 <큰 생각>이었다.
가장 저명한 거대담론은 사상이었다. 20세기 이후 인류를 반쪽으로 쪼개면서 혁명과 내전과 냉전을 일으킨 그 사상이다. 상당수의 진보가 사회주의 사상의 진영에 동참했다. 지극히 일부의 나라를 제외하고 세상에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병폐를 비판하면서 평등이념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이오전쟁 전까지 몇 년 동안, 그리고 1980년대, 그 시절 진보에게는 사상의 시대였다.
이처럼, <큰 생각>이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커다란 비전은 사람을 뜨겁게 만든다. 그런 큰 목표가 그 목표에서 비롯된 아우라가 한국의 진보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비전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그런데 자욱했던 비전이 안개 거치듯 사라져버렸다. 1990년 소련이 몰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담론의 종언’ 혹은 ‘거대담론의 해체’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사회 혁명을 바라는 급진 사상이 만들어 냈던 거대담론에 균열이 생겼다. 쩍쩍 벌어졌다. 그 무렵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타인이 제시한 정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 자기가 생각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과 다르다. 해답을 체념하는 대신 자유를 얻는다. 멋있어 보였겠지. 사상을 잃은 진보는 뭔 말인지 모르면서 그 주위를 배회했다. 그사이 인류를 체념한 프랑스 현대사상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지불식간에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버렸다.
YS와 DJ의 연이은 집권에 따라 한국역사를 좀먹던 독재가 청산됐다. 진보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에 매우 적당한 것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진보에게는 큰 비전을 상실하는 일이었다. 독재는 쫓겨났고 민주주의는 쟁취됐다.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라는 신화는 끝났다. 다음 문장이 시작되려 했다. 이제 마침표를 찍으세요. 그러나 진보는 마침표를 ‘찌이이이이이익어야’ 하는데, 거의 20년간 마침표를 찍는 슬로모션을 하고 있다. 어째서? 그게 진보가 진보이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징표로 여겨졌으니까. 그걸 끝내버리면 자기 존재 자체가 부정됨을 본능처럼 아니까.
— 거대담론은 이제 낡았어.
— 민주주의는 이뤄냈잖아.
— 사상의 시대도 끝났어.
— “이념의 시대는 저물었지.” (정말?)
그러고는 진보는 <큰 생각>을 버렸다. 세상은 다종다양한 미시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진보정치가 할 일이라 여겼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껏 찾은 것이 ‘생활정치’였다. 그리고 무슨무슨 ‘개혁’이었다. 생활정치의 내용이 무엇이든, 개혁의 대상이 뭐든 그건 비전이 아니다. 원대한 생각도 커다란 이념도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며, 그런 시대에 이르렀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거대한’ 착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대꾸할 수는 있다.
— 아니, 너는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웬, 거대담론이 필요하다는 거야?
나는 이렇게 답한다.
—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게 진보에게 필요하니까요.
신화가 없으면 진보는 멸망하기 때문이다. 이 명제를 뒷받침하는 상식적인 근거는 많다. 먼저, 똑똑한 사람들이 진보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감이 높은 사람들이 진보에 합류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인생을 꿈꾼다. 안락이 좋고, 부자가 된다면 더욱 좋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해서 성공한다면 짜릿할 것이다. 누구나 원하는 인생이지 않나? 그런데 그런 건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독재시대에도 그랬으며, 혼란의 시대이든 환락의 시대이든 평혼의 시대이든, 어느 시대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쨌든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도, 나라를 위해, 사회를 위해, 민중을 위해, 사적인 꿈을 잠시 유보하고, 아니, 공공의 목표를 자기 인생의 꿈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꼭 나타나는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가 모인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답은 상식적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사적인 꿈보다 훨씬 크고 매력적인 <큰 생각>이 담긴 진보 이념이 자기 인생에 에너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없을까? 누구도 그런 비전을 진보 이념으로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화가 사라진 곳에서 진보는 옛 사람을 추억하기만 한다. 실상 아무도 신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어, 이 놈은 그럼 소수 지식인이 주도하는 역사를 생각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라, 진보는 늙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충분히 늙었다. 인재가 필요하다. 당신들의 젊은 시절처럼 <큰 생각>에 청춘을 바칠 만한 그런 젊은 진보가 필요하다. 가장 명철한 사람들이 합류하는 진보와 가장 어벙한 사람들만 남아 있는 진보 사이에서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는 더 얘기하지 않아도 될 문제다. 물론 이는 몇몇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큰 생각>은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며 이곳저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야를 준다. 더 많은 무리에게서 더 강한 지지를 받는 데도 강점이 있다.
요즘 진보가 좋아하는 생활정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좋다. 생활정치의 훈훈한 체험담과 성공사례를 들어줄 수는 있다. 그러나 헌신할 이유는 없다. 그걸 곧이 곧대로 따를 이유도 없다. 당신의 생활과 내 생활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쪽의 생활과 이쪽의 생활은 상이하다. 생활정치가 실제로 국민 생활의 문제 혹은 갈등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생활문제에서 부딪히는 생각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런 기대는 해볼 수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이 다양한 미덕에 둘러싸여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다양한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진보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다. 또한 다양한 미덕에 둘러싸여 공론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진보는 이익과 이해관계에 밝다. 그러므로 그런 기대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생활정치는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원대한 목표를 향해 가는 정치가 아니다. 기껏해야 단지 이해관계의 충돌 문제에서 빗겨간 영역들에서, 공공자원을 더 많이 활용해서 둘레길을 정비하고, 감시 카메라를 더 많이 설치하고, 이런저런 지원사업을 늘리고, 공공건물을 신축하고 증축하는 일 등을 하는 것인데, 이런 공공자원의 활용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보수가 더 잘할 수도 있다.
개혁? 그것도 좋다. 더 좋게 개혁하면 좀 더 좋지. 개혁의 대의와 내용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다. 우선 다 찬성한다고 가정해 보자(어디까지나 가정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된 어떤 <큰 생각>이 있어서, 그런 <큰 생각>의 의도에 따라 개혁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게 뭔가? 정의? 절대적인 정의인가 아니면 필요에 따라 빚어낸 편의적인 정의인가?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들은 개인개인의 사적인 인생 개혁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큰 생각>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개혁을 검찰개혁이나 교육개혁만큼 시급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혁이 없다고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니지만, 자기 인생을 개혁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진보가 주창하는 개혁에서 멀어진다. 개혁은 <큰 생각>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한다.
비정규직 문제, 최저임금의 문제, 복지문제 등등 진보적인 아젠더들이 물론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듣는 대중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와 진보 아젠더를 비교한다. 대중들도 계산기를 두드리고, 진보도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런데 보수도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러는 사이 <큰 생각>이 없는 진보는 시시해졌다. 진보의 아젠더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창의 아이디어 경진대회에 출품하는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그런데 매력적이지 않다. 상품성(!)도 없다. 지적인 흥분도 안 생기고, 뭐시 정의감인지도 헷갈린다. 진보가 평범해진 것이다. 평범하고 진부해졌는데 묘하게도 지나치게 진지하고, 너무 심각하다. 원대한 생각도 아니면서 무슨 대단한 시대적 요청을 제시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런 어긋남이 하루이틀이 아니고 십 년 이십 년이다. 그러니 멸망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회사를 고를 때도(고를 수만 있다면) 미래를 향한 큰 비전을 제시하는 회사를 선택한다. 진보가 제시하는 이야기에는 비전이 없다. 위에서 말한 생활정치? 부동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이야기되는 그런 담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이제 우리는 어째서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가 매력이 없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찾아낸 것 같다. 시시하기 때문이다. 비전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려 하고 진지하기만 하니 킹받기 때문이다. 아, 꼰대 같은 진보라니.
— 그런데 거대담론을 어떻게 찾아내겠어? 그런 게 있기라도 해? 이런 시대에…
거대담론에 관해, 한국 진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을 너무 쉽게 버렸다는 것뿐 아니라(지금까지 그런 얘기를 했다), 새로운 거대담론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기 전에 우선 <큰 생각>을 버린 진보의 퇴락을 더 살펴보자.
진보는 <큰 생각>을 버렸다. 그때 무엇이 함께 버려졌을까? 이념, 정의, 이성, 지성도 함께 버려졌다. 이런 단어 중에서 ‘지성’을 대표선수로 뽑아 이야기해 보자.
어느 시대에서나 진보는 <큰 생각>에 걸맞는 지성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불만족에서, 더 나은 세계를 바라보려는 의지에는 상당한 수준의 지성이 필요하다. 정의는 지성적인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들은 체제에 순응하지만 진보는 체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상식을, 새로운 문화를, 새로운 인류를, 그런 <큰 생각>을 제시했다. 이것은 당장의 유불리 계산을 초월한 이성적인 비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큰 생각>을 버리자 그런 생각에 어울리는 높은 수준의 지성이 더이상 필요없게 됐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스스로를 진보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자란 생각으로 진보를 치장하므로 그걸 더 그럴싸하게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이 이득이 되고 무엇이 손해가 되는지 따져야 했다. 한국의 진보는, 어느 곳에서든, 모두가, 무엇인가를, 분석한다. 가치 분석이 아니다. 유불리 분석이다. 목표를 향한 분석이 아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습관은 권력애를 낳고, 습관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낳는다. 이 두 가지는 진보적인 특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부와 권력이 진보와 밀접해졌다. 나는 여전히 진보의 양심을 믿는다. 그러나 습관은 그들의 양심을 병들게 했다. 공공연한 영역에서는, 모두가 국회의원이며 모두가 뛰어난 전략가이며 모두가 대통령인 것처럼 분석하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계산이 밝지 못한 진보는 누군가 계산한 결과를 공유하면서 ‘스톰트루퍼’로 행동한다. 은밀한 영역에서는, 소수의 진보가 끼리끼리 이익을 공유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 진보가 있다. 세력이 있는 진보는 그 이익을 차지할 것이고, 세력이 없는 진보는 머릿속에서나마 그런 이익에 대한 소유를 선언한다.
이익을 찾아야 할 곳에 진보가 있다. 손해를 보는 것은 무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유리함을 위해 말을 바꿔도 좋고, 불리함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도 좋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실증적인 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예들을 스스로 떠올려 봤으면 한다. 교언영색과 표리부동과 언행불일치와 내로남불을 통제할 지성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 진보의 지도자는 그 시대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었다. 평생을 진보 이념에 헌신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한데 모아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진보 이념 속에서 스스로 성장한 인간이었다. 지금의 진보 지도자는 계산기 두드리기로 정해진다. 그/그녀가 평생 어떤 헌신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당선 가능성만이 그/그녀를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 진보의 역사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지도자로 뽑히지 않을 것이며, 바깥에서 만들어진 ‘상품’이, 단지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지도자로 스카웃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와 보수는 구별이 어려워졌다. 또한 이런 점에서 스스로 지도자를 키워내지 못하는 진보는 멸망이 필연적이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진보를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누군가를 특정해서 비난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큰 생각>이 없는 진보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그러나 그들은 진보라고 믿는다). 진보는 일종의 정신적 패션이므로 진보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물론 괜찮다. 그렇다면 굳이 보수와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당신은 또 어떤 이익 때문에 지금 고함을 치고 있는가?
진보는 <큰 생각>을 상실했다. 빼앗긴 게 아니라 스스로 폐기한 것이다. 그리고 지성을 버렸다. ‘반지성주의’로 비판을 받더라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행위를 중단하지 못한다.
진보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본인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런 진술이 부끄러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지성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본인이 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고서도 그 책을 비난하고 징벌하는 탁월한 능력도 겸비했다. 진보의 세계에서 운명은 유불리로 정해지기 때문에 그런 능력도 생겼다. 표현의 자유는 책에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 계산기 위해서 결정된다.
— 꼭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게 의무다. 그런 사람들은 더 많은 지혜를 궁구하고 더 많은 지식에 경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독서를 강조하지 않는가? 그런데 책을 읽지 않는 진보는 보수보다 출판산업에 더 많은 지원을 한다. 책을 좋아해서? 아니, 그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책은 진보에게 정신적 액세서리다. 그 정도면 족하다. 더러 책을 읽는 진보가 물론 있다. 그들은 ‘요약본’을 읽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도의 요약본이라면 만족할 것이다(대부분 책꽂이에 장식되어 있을 뿐이겠지만). 강사의 시대, 유튜버의 시대는 지금 진보의 지적인 수준에 충분하다.
진보는 지성 대신 계산기를 택했다. 그렇다고 이 ‘계산기 기계’가 성능이 좋은 것도 아니다. 2022년 2월 24일 지구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주권국가를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했으며 평화를 짓밟았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러시아에 누가 감히 대들 수 있는가라는 깡패국가의 안하무인식 행동이었다. 어떤 명예도 어떤 명분도 없는 침공으로 말미암아 인도주의적 대위기가 발생했다. 자, 한국의 진보는 어땠는가? 이런 국제적인 문제에서도 계산하기 바쁘고 열심히 분석한다. 과거의 진보이념에서는 제국이 자신의 군사력을 믿고 침공하다니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진보이념에서는 독재 국가가 남의 나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하니 적극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니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진보는 <큰 생각>을 버렸으므로, 이념이랄 게 없으므로, 서양의 결속과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적극적인 대처와 다른 태도를 보여줬다.
한국의 진보는 망설인다. 아직 계산 중이다. 몇몇이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NATO의 동진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노라고. 러시아와 중국의 주장을 택한 것이다. 결국 침략국가가 내세운 세계관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라 편을 들고 있는 분석이다. 이것이 한국의 진보 수준이다.
위에서 나는 요즘 진보가 좋아하는 <생활정치> 이야기를 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이 다양한 미덕에 둘러싸여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다양한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해 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진보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활정치에 대한 기대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로 그러하다. 어떤 지역에 어떤 심각한 갈등과 요구가 발생했다고 가정하자. 어떤 가치를 좇아, 서로 공유한 지성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따져 본다. 이익에 부합하면 민의에 맞게 권력을 사용하고,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민의를 외면하며 권력을 사용한다. 이런 일이 진보에게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는 멸망했다. 아니면 곧 자연사할 것이다. 진보가 지금은 의기양양해도 진보보다 계산을 잘하는 무리들이 있다. 첫째 관료들이다. 진보가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관료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관료가 진보를 대체할 수밖에 없다. ‘영입 인사’가 돼서 진보의 지도자인 양 행세하며 진보를 대체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진보를 대체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는 인재를 양성하지 않아도 괜찮다. ‘고위 권력’은 진보 상층부에 있는 ‘고도의 계산기들’과 관료의 짬짬이로 충당된다. 둘째 기업가들과 그들이 거느린 전문가 그룹이다.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누군가 이렇게 반문한다.
— 누군가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분석하고 계산해야 하지 않는가?
좋지. 조직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당연한 얘기다. 명철한 사람들이 맡는 역할이 따로 있겠고 분석은 행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어느 곳에서든, 모두가,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계산한다. 무엇이 유리하고, 무엇이 불리한가를.
나는 위에서 한국의 진보가 멸망한 첫 번째 이유로 거대담론을 버렸고, 새로운 비전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대담론을 <큰 생각>으로 바꿔 표현했다. <큰 생각>은 사회 전반의 문제점들을 관통하는 커다란 원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회가 가야 하는 커다란 목표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한다. 인간사회에 대한 커다란 생각과 큰 비전이 담겨 있는 이야기를 뜻한다. 진보는 그것을 버렸고, 되찾지 않는다.
거대담론의 가장 좋은 부분은 지금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에 비전이다. 이것은 높은 이성을 동반한다. 이성적으로, 차분히, 두루,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집단이성이라 부른다. 반면 거대담론의 가장 나쁜 부분이 있고 그걸 집단감정이라 부른다. 거대담론이 지배했던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성적인 통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감정적인 분노와 혐오를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는 거대담론을, <큰 생각>을 상실했다. <큰 생각>의 가장 좋은 부분을 잃고, 대신 가장 나쁜 부분은 남아버렸다.
그것이 한국 진보가 그토록 감정적인 이유다. 이성이란 무엇인가? 높은 수준의 원리를 발견하는 사고능력이다. 그런데 <높은 수준의 원리>를 폐기해 버렸다. 이성의 역할이 축소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는 항상 흥분해 있다. 조롱과 혐오가 만연되어 있으며, 지성을 공유하기보다는 감정을 공유한다. 그러면서 '우리'라는 정체성을 확인한다. 지성이 진보집단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진보집단의 정체성을 구현화한다. 다른 견해는 '우리'에 대한 공격으로 취급된다. 공감의 범위가 줄어든다. 사람들의 감정,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은 먼저 '우리'라는 것이 확인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합리적인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며, 무엇인가 쫓기듯 초조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어떤 개인은 이성적이며, 지적이고, 미덕을 갖췄다. 그러나 그런 <진보 개인>은 <진보 집단> 속에서 고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진보 집단>은 거대한 감정집단으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정집단 속에서 계산된 이익(유리함과 불리함)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사회적인 도덕감정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도, 우리편이라면, 우리편이므로, 집단감정을 동원해서 방어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도 없다. 보수가 집권하면 항상 나라가 망한다고 뻥쳐 왔지만(이 부분은 보수파들도 마찬가지), 늑대 놀이를 하던 양치기 소년의 우화를 사람들은 안다.
이성적으로 분노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이성을 자극하기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진보는 시시하다. 매력적이지도 않다. 다음 세대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는 수명이 다한 것이다.
이번 진보는 멸망했다. 혹자는 진보라는 패션쇼를 하든 보수라는 전시회를 하든, 그냥 이대로 놨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유지되는 한, 괜찮을 것이다. 괴물만 나오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괜찮을 것이다. 또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상상력을 넘는 세계가 펼쳐질지 모른다.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진보의 병폐를 지적한 다음, 치료약을 제안하는 얘기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솔루션은 필요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 지금 이 시대의 거대담론이 있기나 할까?
진심으로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진보는 여전히 자신들은 <큰 생각>을 버리지 않았노라고, 노동자 중심의 사상을 지켜내고 있다며 대견하게 생각한다. 맑스주의는 끝났다. 변증법은 무너졌다. ‘일송정~’으로 시작하는 선구자라는 노래가 있다. 거기 선구자는 말을 타고 활을 쏜다. 당시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총포로 전쟁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선구자를 노래한다. 이런 추억송은 진보의 이념이 아니다.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 누군가 공감한다면, 이익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뿐이다.
나는 <큰 생각>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닌 더 큰 이념에서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생태주의를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생태주의의 시공간과 일반 대중의 시공간 사이의 간극, 생태주의 과학과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는 과학 사이의 간격을 줄이려는 시도가 없다면, 환경과 산업 사이의 균형을 먼저 풀어놓지 않는다면,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페미니즘도 검토할 수 있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19세기 이후 페미니즘이 이성적인 영역에서 인류의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의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라보는 매우 좁은 창문이다. 그것이 거대담론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아니면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지혜가 여전히 새롭게 전승되는 대목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다지 이성적이지 못하고, 반지성주의의 집단감정에 포획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인류의 지혜를 찾으려고 할 것 같지는 않다.
지구촌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진보는 ‘지구’를 얘기하면 시장을 먼저 떠올리고, 시장이 떠오르면 보수 아젠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보는 국제사회를 넓게 보지 않는다. 한반도에 시야가 머물러 있다. 지구를 본다는 것은 ‘인류’를 본다는 의미이다. 1990년의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2022년의 위상을 비교하는 것도 좋고, 1990년 그 시절 비전을 찾으려는 20대의 관심사와 지금 비전을 찾으려는 20대의 관심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런 국제적인 시야에서 대한민국 헌법정신에서 <큰 생각>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전문에서 선언하고 있다. 안에서 찾지 못했다면 밖에서 찾을 수 있다.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 국제사회의 평화와 인도적 요청에 더 크게 기여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해외에 진출하면서 더 많은 외국인을 수용하는 다양성의 이념, 이 정도는 다음 진보의 <큰 생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큰 생각>을 복원해야 한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다지 유용한 글은 아닙니다. 그냥 생각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사적인 목적으로 써봤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진보는 제시할 비전이 없다. 둘째 지성 대신 계산기를 택했다. 셋째 진보는 높은 이성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거대한 감정집단으로 결속해 있다. 이런 진보는 정신적 패션에 불과하다. 다음 진보가 나타난다면 <큰 생각>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