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 문제, 데카르트와 흄
2023 수능 윤리와 사상 과목 5번 문제.
기출문제를 푸는 건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철학에 관심이 있는 어른들에게도 유용하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할아버지들. 인류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상이기도 하고, 어떤 시험이든 반드시 나오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왜? 지식(이라고 써놓고 실은 맹신)의 저주에서 인류를 구해낸, 그래서 타인의 생각을 받아쓰기에 급급했던 과거의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거듭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기 때문.
둘 다 회의론자들이다. 둘 다 '우리 인류는 꿈꾸고 있는 걸지도 몰라'라고 생각해 봤던 분들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의 사유는 <방법적 회의>라고 하고, 흄은 그냥 <회의주의자>. 그런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인류에게 '생각'이라는 선물을 줬고(그 이전의 인류는 생각은 일부 계층 사람들의 특권;;;), 흄은 인간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본 최초의 탐험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어렵지 않다. 누구든지 데카르트 할아버지로 빙의해서 생각하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자명한 말씀을 하기 때문이다. 흄 할아버지는 좀 어렵다. 내가 아직 흄의 책을 정독하지는 못해서 뭐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데카르트 철학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해도, 혹시 우리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혹시 가상현실에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이 세상은 홀로그램이 아닐까... 한번 의심을 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을 해보니, 진짜로 꿈꾸고 있는 것 같고, 진짜 가상현실에 있는 것 같고(본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홀로그램 같기도 하고....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세상이 진짜 존재하는지를 명확하게 증명해 주는 증거가 없다 이거야. 그런데,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의심해 보고 저렇게도 의심해 보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는 거였지. 그래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어. 그게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건 '방법적 회의'론의 시작점이 아니라 도착점이었다. 이런 결론에 도착한 다음에, 다시 철학을 시작하는 것. 그런데 생각이란 이성적인 것. 우리는 경험에서 생각이 나온 게 아니라(경험에서 생각이 나왔다면 그게 꿈/가상현실/홀로그램이 아닌지 증명할 수 없으니까), 이성에서 생각이 나온 것. 결국 데카르트는 이성 중심의 철학을 펼쳐낼 수밖에 없는 논리다. 그래서 그것이 제1원리. 제1원리는 '사유'뿐 아니라 '행동'의 원리이기도 하고, 결국 도덕(도덕은 행동의 원리임)도 이성에 의해 정해질 것.
흄의 경우에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본다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와 같다. 그러나 흄은 영국 경험주의 전통에 있는 분. 데카르트가 신뢰했던 이성이라는 것이 결국은 경험을 통해, 경험할 때의 머릿속 감각을 통해, 그 감각에서 만들어 낸 머릿속 관념이 만들어 낸 것, 그러므로 이성적인 것은 사실 '관념의 다발'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어 낸 게 바로 경험이고, 그런데 경험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꿈/가상현실/홀로그램일 수도 있으므로... 아, 이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네. 회의론에 빠지고 만다. 인간은 '이론적으로는' 감각에 의해 대상의 인상을 받아들이고, '실천적으로는'(즉, 도덕적으로는),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 그러므로 도덕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 그 감정을 '정념(Passion)'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나쁜 행동을 목격하고 화가 난다. 그것은 이성의 명령인가? 아니면 나의 도덕감정이 훼손된 것인가. 흄의 입장은 후자 쪽.
여기까지는 데카르트와 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이제 문제를 살펴보자. 갑은 데카르트, 을은 흄. 여기까지는 쉽게 도착해야 한다. ①은 잘못. 이것도 의심해 보고 저것도 의심해 봐도,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실은 자명하고 부정할 수 없다. <생각하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에게는 자명한 진리다.
② 아이고, 암기식으로 데카르트를 공부한 학생은 낚이겠네. 방법적 회의는 출발점이 없다. 그냥 다 의심해 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확실성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다.
③ '유용성(공리)은 도덕감의 근원으로 타인과 관련해서만 고려된다'는 어떤 사상에서도 성립하지 않는 견해. 밑줄은 공리주의. 공리주의 조차 타인뿐 아니라 나에게도 유용성(공리)가 고려된다. 3번은 무조건 잘못이고, 이걸 선택한 학생은 거의 없겠지.
④ 제시문을 보라.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다. 노예가 어떻게 주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이런 명백한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대철학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도 틀렸다.
결국 ⑤번이 정답이 되겠는데.... 인간의 이성은 추론적 사유와 진위 판단 능력을 지닌다. 이것은 이성(Reason)의 사전적 정의를 풀어쓴 것이다. 추론적 사유를 영어로 Reasoning이라고 한다. 무엇인가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능력은, 어떤 시금석을 갖고 비교해서 결론을 추론하는 행위, 즉, 그게 바로 이성의 능력이다. 어떤 철학자도 ⑤번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답은 ⑤번.
이 문제를 잘 푼 학생은 제대로 공부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