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실력이야. 실력이 곧 승리고.
“각 학교 감독 선생님들 구령대로 모여주세요. 감독자 회의 및 올해 새로 적용되는 룰 점검하겠습니다.”
심판의 말에 세라초를 비롯한 4개의 학교 감독들이 구령대로 모였다. 매년 강조하는 사항이지만 학생들의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선 경기 규칙에 대한 세부사항까지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윤표쌤은 귀를 쫑긋 세워 자신이 알고 있는 룰이 심판의 그것과 맞는지 비교해 보며 듣는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올해부터 전, 후반 10분씩 총 20분을 뛴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성만쌤이 손을 들어 심판에게 질문한다. 마치 모든 감독들에게 새로 적용되는 룰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눈치다.
“네, 맞습니다. 예년의 10분간 경기가 너무 짧고 후보 선수들에게도 출전 기회를 폭넓게 주는 의미로 올해부터 20분입니다. 선수 교체는 제한 없이 하시면 되고요. 단. 공격권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래서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7명 더 많은 후보군을 데리고 연습했지.
이 무더운 날씨에 선수 교체는 큰 변수다.‘
“먼저 1경기 세라초 대 동혜초 준비하겠습니다. 선수들 라인 업 시켜주세요.” 심판의 말에 일제히 세라초 A조 학생 7명이 일어났다. 윤표쌤은 먼저 A조를 투입시켜 점수차를 벌린 뒤, B조와 C조 선수들을 투입해 출전 기회를 부여하기로 했다.
“우리는 4개월간 거의 매일 아침 연습했잖아. 하던 대로 하면 되고 그래도 안되면 그게 우리 실력인 거야. 후회 없는 경기 하고 가자고. 알겠니? 하이파이브 하자. 하나, 둘, 셋.”
“세라, 세라, 세라, 파이팅!”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선수들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양 팀 주장들이 모여 먼저 공격할지 여부를 묻는 뽑기를 했다. 은정이는 동전의 앞면을 골랐고 앞면이 나와 세라초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장에 들어오기 전, 심장이 곤두박질쳤지만 디스크를 잡으니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 그래, 늘 나와 같은 라인에 우림이, 하은이가 있었고 여기에도 있다. 왼쪽에 담희랑 윤아, 오른쪽에 서윤이와 단비가 있다. 학교랑 똑같은 조건인 거야. 하던 대로 하자고.’
“풀!!” 심판의 큰 외침과 함께 은정이는 멀리 디스크를 날렸고 양 팀 선수 모두 경기장으로 뛰쳐나와 포지션을 갖추었다.
“앞에서부터 커트해. 앞에서부터! 주기 쉬운 사람부터 패스해!” 경기가 시작하기 무섭게 윤표쌤은 아우트라인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전술 지시를 했다. 동혜초의 패스가 담희의 적극적인 수비로 막혔다. 막히기가 무섭게 우림이가 디스크를 들어줄 곳을 찾으니 양쪽 사이드에 서윤이와 윤아가 노마크로 디스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비가 달려들기 전에 궤적이 큰 포핸드 스트로크를 구사했고 엔드 존 안에 들어가 있던 서윤이가 정확하게 캐치하였다. 득점이었다.
“와!” 세라초 벤치에서는 귀가 떠나갈 정도로 큰 함성이 쏟아졌다. 양 팀은 서로 엔드 존을 맞바꾸는 동안 윤표쌤이 B조에게 몸을 풀라는 지시를 했다.
‘왠지 이번 판은 크게 이길 수도 있겠다. 분위기를 완전 우리 쪽으로 끌어올리고 모든 선수를 출전시켜야지.’
은정이는 ‘풀’ 사인과 함께 멀리 플라잉디스크를 달렸고 상대편 수비 지역 가까이까지 날아가게 했다. 동혜초도 공격을 전개해나가려 했지만 백핸드로만 대응하려니 도저히 우리 편에 패스할 각이 나오지 않았다. 급하게 아무 데나 날리니 디스크가 역회전이 걸려 오히려 세라초에게 유리한 찬스가 일어나기 일쑤였다. 롱패스가 빠르고 정확한 우림이와 하은이는 수비가 없는 빈 공간에 잘 침투해 있는 윤아와 서윤이에게 패스했고 두 선수 모두 실수 없이 캐치해 냈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3:0이라는 작년과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일어났다. 윤표쌤은 즉시 선수 교체를 요청하며 말했다.
“A조 전부 들어오고, B조 전원 들어갑니다”
경기에 목이 말라있는 데다 사기충천이 된 B조가 기세 좋게 경기장에 뛰어들어왔고 전혀 공격에 실마리를 풀지 못하는 동혜초는 실수를 연발하거나 디스크를 걷어내기에 급급했다. B조에게도 위기가 몇 번 찾아왔으나 키가 큰 은서가 상대의 공격을 커트해 냈고 패스가 좋은 유진이, 침투력이 좋은 민아가 있어 오히려 손쉽게 경기를 이끌어냈다. 전반 종료. 5:0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큰 점수차를 만든 세라초는 후반전에 C조를 투입하는 여유와 함께 10분간의 공방전을 치렀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 종료. 세라초 여자 플라잉디스크 부의 역사상 첫 승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양 팀 정렬해 주세요. 상호 간의 인사.” 심판의 인사와 함께 세라초 선수들은 일제히 어깨동무를 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제야 윤표쌤의 입에서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자, 경기도 이겼고 전원 출전 기회 부여라는 두 마리 토끼 모두 잡았다. 그다음은 승리뿐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곡현초와 구르미초의 벤치가 다소 바빠졌다. 첫 승의 제물이라고 생각했던 세라초가 생각보다 전력이 강해져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더 분주해진 것은 전통의 우승팀 곡현초였다. 왜냐하면 곡현초는 학부모 응원단을 포함한 약 4~50명의 학교 관계자를 모시고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이어야 할 팀이기에 곡현초는 반드시 우승을 해야만 했다.
“자, 다음 경기는 우리가 작년에 초전박살이 났던 구르미초다. 구르미초 잡고 곡현까지 잡으면 전국대회 진출이다.” 윤표쌤의 선글라스 밑으로 땀이 데구루루 떨어졌다. 30도가 넘는 뙤약볕에서 학생들만큼이나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니 윤표쌤의 옷은 이미 절반 이상이 땀으로 젖어있다. 2경기 곡현초와 구르미초의 경기는 곡현초의 승리로 끝이 났다.
15분간의 휴식을 마치고 이어서 3경기 세라초 대 구르미초의 경기가 이어졌다.
“이번에 A조에 작은 변화를 줄게. 서윤이 대신 효주, 윤아 대신 주은이가 들어가고 후반에 조커로 민서가 들어간다.”
“왜 키 큰애는 다 빠지고 작은 아이들이 들어가요? 불리한 것 아닌가요?” 하은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구르미초가 발이 느려. 쟤네 후반전에 분명 빈틈 생긴다.” 윤표쌤이 단호한 말투로 대답한다.
은정이의 풀로 3경기가 진행되었다. 구르미초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는 탓에 세라초 선수 한 명씩 개인 마크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확실히 수비가 잘 달라붙자 은정이와 하은이가 단번에 롱패스를 전달하기 어려웠다. 윤표쌤이 바로 크게 외친다. “티키타카로 전환!” 윤표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이와 우림이, 하은이가 서로의 간격을 좁혀 숏패스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패스 간격이 좁고 빨라 수비가 미처 달라붙기 전에 디스크가 구르미초 수비 틈 사이로 전달되었다. 상대편 엔드 존 근처로 가까이 오자 효주, 주은이, 민서가 귀신같은 스피드로 수비 뒷공간으로 침투했고 그것을 은정이나 우림이, 하은이 중 한 명이 빠르게 연결해 공격했다. 이윽고 효주가 멋진 캐치로 엔드 존에서 득점에 성공했다.
“와!!” 세라초 선수들은 모두 한데 엉켜 득점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벤치에서 응원하고 있는 선수들도 함께 효주의 이름을 외치며 기뻐했다. “안효주! 안효주!”
“괜찮아. 좀 더 집중하면 바로 따라잡을 수 있어” 구르미초 성만쌤이 선수들을 다독이며 떨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은정아, 다 괜찮은데 상대편이 롱패스 하면 그거 끊어줘야 한다. 너무 공격 범위를 넓게 제공하면 안 된다.”
“네!”
윤표쌤은 우리 팀의 가장 큰 약점이 뒷공간이 쉽게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후방에서 패스를 담당하는 은정이, 우림이, 하은이가 생각보다 수비 가담력이 약하고 이타적이라는 것도 말이다.
‘스포츠에서 봐주는 건 없어. 봐주면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선수들한테 실례야.’
구르미초 학생들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니 세라초의 수비가 느슨하다는 점을 이용해 롱패스를 자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좀처럼 어느 한 팀의 우위가 발생하지 않은 채 전후반이 종료되었고 점수는 4:4. 승패는 연장으로 가서 결정 나게 되었다.
“주은이, 너 뛸 수 있겠니?” 윤표쌤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주은이에게 물었다.
“네! 뛰다 쓰러져도 좋으니까 제가 할게요.” 주은이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그래. 원래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면 그동안의 고민들도 사라지게 되어 있어’ 윤표쌤이 속으로 생각하며 연장전에 집중해야 할 것을 선수들에게 전달했다.
“양 팀 중 먼저 선취 득점을 올리는 팀이 승리하는 골든골 제도로 운영합니다.”
“얘들아. 들었지. 먼저 득점 올리는 팀이 이긴단다. 그럼 우리는 공격으로 가야겠니, 수비로 가야겠니?”
“공격입니다!” 선수들이 당연하다는 듯 큰 소리로 소리친다.
“효주랑 민서는 너무 잘했고 이번에는 단비가 왼손이 좋기 때문에 은정이 대신해서 왼쪽 라인에 패스를 뿌려줘. 그리고 우림이가 대신 가운데에서 상대 키 큰 친구 막아주고.”
“양 팀 정렬해 주세요.” 심판의 말에 세라초와 구르미초의 연장 전반 경기를 준비한다.
“풀!” 구르미초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왼손이 장기인 단비가 곧바로 왼쪽 라인에 서 있는 윤아를 봤지만 바로 구르미초의 커트로 이어졌다.
“롱패스 못하게 막아야 돼! 롱패스 안돼!” 상대의 롱패스를 우림이가 단숨에 커트하고 이번에는 오른쪽 라인의 하은이에게 전진 패스를 던졌다. 하은이는 그 라인을 따라서 서있는 서윤이를 바라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때 하은이의 뒤를 무섭게 뛰어가며 엔드존 중앙에서 소리쳤다.
“하은아. 패스!” 하은이는 지체 없이 포핸드 스트로크를 길게 뿌렸다. 부메랑 같은 큰 궤적을 따라 주은이는 미친 듯이 디스크만 보고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심판의 휘슬이 길게 울려 퍼졌다.
“10번 캐치. 세라초 득점!” 한 장의 파노라마 같이 흘러가던 경기가 끝이나고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세라초 선수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경기장으로 미친듯이 뛰어 들어왔다.
“3경기는 세라초가 구르미초에게 5대 4로 승리하였습니다. 양 팀 감독님 결과지에 사인 부탁드릴게요.”
감격에 겨워 말을 채 잇지 못했던 윤표쌤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와 결과지에 급하게 서명했다.
“올해는 복수 성공하셨네요. 축하합니다.” 성만쌤이 어인이 벙벙한 윤표쌤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명승부를 펼쳐준 구르미초 친구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성만쌤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선수들을 독려하려고 벤치로 가는데 엉엉 소리를 내며 크게 우는 선수가 있었다. 바로 주은이었다.
“주은아. 너 오늘 사고 크게 칠 줄 알았다. 정말 멋있었어.” 주체할 줄 모르는 눈물을 끝없이 쏟아내는 주은이를 대견하면서도 안쓰럽게 쳐다본 윤표쌤은 이내 선수들을 불러 모아 그늘에 가서 쉬게 했다.
‘자. 이제 1경기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