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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내 인생 최고의 생일 선물

만년 꼴찌 세라초, 마침내 전국대회 진출이라는 기적을 쓰다

by 홍윤표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윤표쌤이 학생들을 휴식시키고 곡현초와 동혜초의 경기 녹화한 영상을 살펴보는데 누군가 나지막이 얘기한다. 민하와 세아였다.

“그래. 무슨 말을 전하러 왔니?” 윤표쌤이 다소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다. 은정이나 하은이가 틈만 나면 윤표쌤 교실을 찾아오거나 SNS로 질문을 쏟아냈던 탓에 당연히 그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종전 준비로 한껏 신경이 곤두서있던 차라 은정이나 하은이였으면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냈을 터. 민하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운다.

“선생님, 사실 저희는 오늘 나머지 경기 안 뛰고 A조 친구들 응원하고 싶어요.”

“네, 저희는 오늘 동혜초랑 1경기 뛰어서 이긴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A조 친구들이 잘해서 같이 전국대회 나가면 저희도 너무 좋을 것 같아서요.” 곁에서 듣고 있던 세아도 민하의 말을 거든다.

윤표쌤은 잠깐 골똘히 생각하더니 둘에게 묻는다.

“이거 너희 C조 전체의 생각인 거니, 아니면 너희 둘만 그렇게 생각한 거니?”

“저희 아까 쉬는 시간에 C조 친구들 다 모여서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A조 친구들이 쭉 뛰다가 힘들면 B조 친구들이 교체하면 되겠다고 다 같이 의견을 모았어요.”

“그리고 이 얘기 A, B, C 다 같이 동의한 거예요. 선생님 아까 화장실 가셨을 때요.”

“그래. 알았다.” 윤표쌤은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민하와 세아의 얘기를 듣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끄응, 그럼 더더욱 질 수 없게 되었잖아.’


“잠시 후 세라초 대 곡현초 최종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양 팀 선발 선수들 라인 업 시켜주세요.”

윤표쌤이 마지막 파이팅을 불어넣기 위해 선수들을 모았다.

“선생님이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것이 무엇인 것 같니?” 윤표쌤이 학생들에게 묻는다.

“승리입니다!” 선수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한데 입을 모아 크게 대답했다.

“아니. 솔직히 승리는 필요 없다.” 윤표쌤의 대답에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우리의 올해 목표는 1승이었고 우리는 이미 그 목표를 2배 이상이나 이뤘어. 그런데 오늘 너희의 모습을 보니 승리보다 더 값진 것을 찾은 것 같아.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음... 팀워크 아닐까요?” 윤아가 말하기 주저하면서 한 마디 꺼냈다.

“바로 행복이다.” 윤표쌤이 대답했고 궁금증으로 가득했던 학생들의 눈망울이 또렷해졌다.

“이 더운 날씨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다니며 웃을 수 있는 사람, 친구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승리를 위해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사람. 그리고... 이 디스크 하나만 가지고도 하루 종일 즐겁게 웃으며 기뻐하는 사람. 그게 바로 너희들이다.”

윤표쌤이 말을 이어나가자 몇 명의 학생들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경기는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지만 난 너희가 그동안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오늘을 계기로 앞으로 더 행복해라. O.K?” “네!” 학생들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수놓았다.

“자, 뭣들하고 있어. A조 얼른 라인업 해서 마음껏 뛰어놀다 와!”

A조 선수들 7명이 일제히 자리에 일어나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간다. 이전 경기와 마찬가지로 은정이, 우림이, 하은이가 후방 라인을 맡고 왼쪽에 윤아, 오른쪽에 서윤이가 위치해 있다. 최전방에는 활동량이 좋은 주은이와 민서가 전반전에 나선다.


“세라초의 풀로 경기 진행하겠습니다. 풀!!”

주심의 외침과 동시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렸고 세라초 주장 은정이의 풀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학교 선수들 모두 디스크가 날아가자마자 일제히 경기장으로 들어와 자신의 포지션에 자리를 잡았다. 최종전이라 그런지 경기장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디펜딩 챔피언 곡현초의 응원석에선 수십 명의 학부모가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었다.

“야, 뭣들하고 있어. 다들 안 일어나?” 세라초 쪽에서 조그마한 소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다언이었다.

“우리 학교는 부모님도 안 오고, 다른 선생님들도 안 왔어.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있잖아. 우리의 목소리를 보여주자고. 곡현초 저기서 저렇게 응원하는 거 보고 짜증 하나 안나?” 다언이가 톡 쏘아 뱉듯 말하자 벤치에 앉아있던 세라초 선수들의 가슴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래. 우리라도 열심히 응원하자. 세라초! 세라초!” 벤치에 앉아있던 세라초 선수들은 모두 일어나 세라초의 승리를 기원하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우림아, 거기서 무리한 패스 하지 마. 패스하기 쉬운 사람부터 찾으라고!”

“거 참. 서윤이는 늘 저기 있으니까 믿고 자신 있게 뿌려도 돼. 실수하면 앞에서부터 압박하면 되잖아!”
윤표쌤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고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4년 연속 우승팀 세라초의 조직력은 그 어느 팀보다 단단해 빈틈을 찾아내기 힘들었다. 상대가 실수하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역습으로 득점을 하던 세라초의 전술은 생각보다 쉽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세라초의 실수를 곡현초가 놓치지 않고 득점으로 일궈냈다. 그렇게 훌쩍 10분이 지나가버리고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점수는 2:4 두 골 차이로 세라초가 뒤진 가운데 끝이 났다.

“자, 일단 와서 물부터 마시고 그늘에서 앉아서 쉬고 있어. 고생들 했다.” 10분간의 혈투를 끝내고 돌아온 선수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경기 시작 또렷했던 눈망울은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30도가 넘는 8월 말의 오후는 그야말로 필드 게임을 뛰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A조 선수들 모두 단 한 명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전반을 끝낸 것에 대해 미안함이 더 컸다. 윤표쌤이 보기에도 A조의 대대적인 선수 교체가 불가피해 보였다.

‘올해 10분의 후반전이 추가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찬스를 준 셈이다. B조도 그간 열심히 해왔으니 B조의 기량을 믿어보자. 음...’

“김해린, 정윤아랑 교체, 경하은, 유단비랑 교체, 안효주, 이주은이랑 교체...” 윤표쌤은 측면 공격과 후방 플레이메이커 쪽에서 변화를 꾀했다. “그리고 민서 대신에 오은서 들어가고.” 상대의 롱 패스에 지속적으로 실점을 하자 키가 큰 은서를 투입시켜 최종 수비를 보강하기로 했다. 상대의 실수를 노리기보다 수비 위주로 경기를 진행한 뒤 디스크의 점유율을 높이는 전술을 택했다.

‘결국엔 정신력 싸움이고 한 골 싸움이다. 차분하게 기회를 노린 다음 단숨에 돌파하는 거다.’

“후반전은 곡현초의 풀로 경기 진행하겠습니다. 풀!!” 심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곡현초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젠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는 최후의 10분이 흘러가게 된 것이다. 은정이는 오른쪽보다 왼쪽의 단비에게 패스했다. 왼손으로 포핸드를 날려 왼쪽 측면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다. 은정이의 패스를 받자 단비는 주변을 살폈고 왼쪽 라인을 따라 뛰어 들어가는 효주를 보았다. 지체 없이 포핸드 스트로크로 효주에게 롱패스를 날리니 효주는 노마크의 상태에서 손쉽게 엔드 존에서 득점을 해냈다. 3:4. 후반 시작하자마자 얻어낸 세라초의 선취점으로 분위기는 이내 알 수 없는 형국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득점 이후 정렬하려 걸어 들어가는 곡현초와 세라초의 선수들에게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가 더욱더 거세졌고 이젠 정말 승리 하나만을 바라보는 외침이 운동장에 가득했다.


“라인 더 올려! 앞에서부터 끊어! 귀찮게 해!” 흐름을 탔다고 생각한 윤표쌤은 상대방을 더욱 거세게 압박하도록 주문했고 쫓기는 입장이 된 곡현초의 플레이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의미한 걷어내기가 반복되기 일쑤였고 그나마 전반에 계속 통하던 롱패스 전략은 은서가 모조리 커트해 내기 일쑤였다. 은서가 수비에 성공하자 은정이는 바로 우림이에게 전진패스를 보냈다. 중앙선 근처에서 좌우를 살피다 다시 은정이에게 백패스하는 순간 수비 뒷공간에서 그림자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지나가는 해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가냘픈 체구에 말수도 많이 없던 해린이는 마치 유령처럼 엔드존으로 파고들었고 은정이는 지체 없이 패스했다. 마치 경기장에 해린이만 존재했던 것처럼 손쉽게 득점. 세라초 벤치는 운동장이 떠나갈 듯 함성소리로 가득했고 곡현초의 벤치는 더욱더 조급해져 갔다. 이러다 정말 세라초가 곡현초를 이기는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지 작전 타임을 불렀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지금처럼 비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고. 앞에서부터 압박하고. 뒷공간이 허용된다 싶으면 은서가 열심히 뛰어주면 돼. 그리고 효주야. 너 너무 지쳐 보인다. 조민아랑 교체.”

“민아야. 너 예전에 우사인 볼트처럼 뛰던 날 있지? 한 번 더 믿어 볼게.”

“아, 그날요? 아 그거 우연이었는데 히히.”

‘참 속이 없는 건지 매일매일
어쩜 저리도 즐겁고 긴장 하나 안 할까.
어쩌면 그게 또 장점일지도.’


윤표쌤은 속으로 생각하며 민아를 막판 조커로 기용하였다. 남은 시간은 4분 30초. 이젠 정말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세라초 풀로 경기 이어나가겠습니다. 풀!”

세라초가 던진 디스크를 곡현초가 이내 이어받아 공격으로 전개했다. 그동안 필승 전략이라 생각했던 롱패스가 통하지 않자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티키타카로 공격 전술을 바꾼 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담희와 단비의 찰거머리 같은 수비는 곡현초도 처음 본 풍경인 듯 좀처럼 뚫어내지 못했다. 중앙선에서 볼을 놓친 곡현초의 디스크를 우림이가 잡았다. 그때 우림이의 등골이 서늘해지고 사슴을 발견한 치타와 같이 쾌속질주하는 소녀를 마주했다. 그것은 바로 민아였다.

민아의 앞쪽 엔드 존에 때마침 수비가 자리 잡기 전이라 엔드 존 깊숙한 곳으로 디스크를 날렸다. 민아가 죽을힘을 다해 뛰어도 디스크를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순간 세계는 마치 슬로 모션 같이 느리게 굴러가고 오직 민아의 몸놀림만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캐치! 세라초 득점!” 후반 조커로 들어간 민아가 득점을 하고 디스크를 격하게 날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10분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남은 시간은 1분 45초. 이제 처지가 바뀐 곡현초는 전원 공격 태세를 갖추었고, 세라초는 빗장을 걸어 잠그며 철저하게 수비 일변도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행여나 디스크를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곧바로 역습을 내줄 위기에 몰린 곡현초는 이렇다 할 공격 루트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마. 침. 내.


“경기 종료되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세라초 선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운동장으로 전부 뛰어나와 얼싸안고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눈물을 와락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울면서 웃고 또 웃고 울기에 바빴다. 윤표쌤도 마음껏 소리를 내며 포효했다. 그 모습은 마치 목동의 손을 피해 달아난 한 마리 야크와 같았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가 마무리되고 곡현초와 세라초는 상호 경례 하며 오늘의 대회를 마무리했다. 곡현초 선수들 모두 부모님과 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고 그 눈물은 경기장을 떠날 때까지 마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신으로부터 전통이 깨졌다는 데서 비롯된 미안함 때문이었을 터.


‘이런 거 보면 참 스포츠는 뜨거운 듯하면서도 냉정하기 그지없어.’


“세라초 여러분. 오늘 플라잉디스크 대회 우승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향후 전국대회 일정 관련해서는 공문으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간단히 기념 촬영을 진행하겠습니다. 메달은 각 학생에게 전달해 주시고 우승기는 학교에 전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여기 보세요.” 교육청 김다영 장학사의 멘트와 함께 약식으로 시상식이 열렸고 학생들은 윤표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그렇게 뜨거웠던 하루는 마무리되었고 세라초 선수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러 역으로 걸어갔다.

“와. 밀양에 맛있는 음식점 뭐가 있지? 너 밀양 가 봄?”

“아니 나 한 번도 안 가 봤지. 그 뭐시냐. 음악 책에 밀양 아리랑인가 있지 않음?”

“와. 나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엄마가 거짓말하지 말래서 메달 찍어서 보내 주니까 엄마가 엄청 놀랬음.”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선수들은 여기저기서 웃음꽃을 피우며 오늘을 추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속에서 윤표쌤에게 쓱 다가와한 학생이 말을 걸었다. 은정이었다.

“쌤. 저 진짜 오늘 못 잊을 거예요.”

“왜. 우승해서?”

“아뇨. 저 오늘 생일이에요.”

“얘들아. 오늘 주장님 생일이란다.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 시작!”

“아. 하지 마요. 창피하게 진짜.” 은정이만 빼놓고 일제히 거리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고 그걸 즐기기라도 한 듯 윤표쌤은 허공을 향해 열심히 지휘하는 흉내를 냈다.

‘아. 진짜 괜히 얘기했어.’

은정이는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정말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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