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경기를 보여주고 오는 거야
“그럴 수 있어. 엔드 존까지 들어갈 수 있게 여유를 갖고 움직여.”
“그렇지~ 그럴 수 있어. 은서가 키가 3m였으면 캐치했을 거야.”
윤표쌤이 전술 훈련을 하면서 선수들을 다독이고 있다.
“윤표쌤 오늘 기분 되게 좋으신가 보다. 또 농담 타임 시작한 듯.”
하은이가 손가락에 붙인 거즈를 떼어내며 우림이에게 말한다.
“야. 경하은. 넌 근데 무슨 봉숭아 물을 11월인데 하고 있냐?” 은정이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우리 엄마가 원래 봉숭아 물은 여름에 하는 건데 올해 여름이 너무 길어서 지금 해도 될 것 같다고 그러셨거든. 혹시 알아? 다음 달이 12월이니까 나도 남친 생길지?” 하은이가 호들갑을 떨며 은정이에게 말한다.
“하긴 오늘도 11월 1일인데 무지하게 덥다. 윤표쌤 봐봐. 아침 8시인데 벌써 옷 다 젖음.” 우림이가 신기한 광경을 봤다는 듯 놀란 눈을 하며 말한다.
“자. 일단 모여봐. 할 말 있어.” 윤표쌤이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선수들을 운동장 스탠드로 불러 모은다.
“오늘 하교하고 단체 방에 다음 주 전국대회 일정 업로드 할 거야. 그리고 수요일 5교시 마치고 영어 2실로 다들 오세요. 간단하게 안전교육이랑 학교폭력예방교육 간담회 있으니까. 오케이?”
‘와... 이제 드디어 가는구나. 우리랑 붙는 학교는 얼마나 강한 팀일까? 과연 우리는 이길 수 있을까?’
은정이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애들이 아빠 보고 싶어서 난리 칠 텐데 큰일이네.”
윤표쌤의 와이프가 빨랫감을 개면서 혼잣말하듯 얘기한다. 윤표쌤은 주말을 반납하고 출장을 가는 동안 홀로 육아를 책임져야 할 와이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경기가 빨리 끝나면 서울로 금방 돌아올 수도 있어.” 윤표쌤이 와이프의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한 마디 건넨다.
“그럴 거면 뭐 하러 거기까지 가서 고생을 해. 기왕 하는 거 이기고 돌아와야지.” 윤표쌤의 와이프가 잔뜩 쌓여 있는 아이들 내복과 수건을 한 아름 안고 일어서며 말한다.
“애들 신경 쓰지 말고 잘하고 와. 그리고 다음에 나 자유시간 이틀 주면 쌤쌤이니까 그리 알고.”
“알겠어. 히히. 고마워 여보.” 윤표쌤이 애교 섞인 말투로 너스레를 떠는 것을 윤표쌤의 와이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윤표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랍장 맨 위 칸을 열어 검은색 케이스를 꺼낸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낡고 도금이 벗겨진 검은색 선글라스 하나가 나타난다.
‘이번 한 번까지만 도와다오. 잘 부탁한다.’
“홍 부장님. 우리 학교 첫 경기가 토요일 몇 시에 잡혀 있어요?” 차 교감이 윤표쌤에게 말한다.
“저희 첫 경기가 오전 10시 15분에 잡혀 있습니다. 왜 그러세요?”
“다름이 아니라 교장선생님께서 내일 부장님들 모시고 새벽에 밀양 응원 다녀오자고 그러셔가지고요.”
“네? 정말요? 아이고. 서울에서 새벽에 밀양까지 오시려면 차 안 막혀도 3~4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너무 힘드시지 않을까요?”
“아이고. 가서 지도하시랴 애들 관리하시랴 같이 가는 부장님들이 더 힘드시죠. 내일 교육청에서 장학사 분도 밀양 가신다고 그러더라고요. 이게 동부교육청에서 서울시 대표는 우리 학교가 유일하다고 하더라고요. 맞죠?”
“네. 뭐. 따져 보면 아마 그렇긴 한데... 아무쪼록 너무 물심양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네요. 아이들에게도 뜻깊은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하네요.” 윤표쌤이 머쓱해하며 대답한다.
“제가 내일 가면서 연락드릴 테니까 어디에 주차하면 좋을지 말씀해 주세요. 오늘 밤에 좀 수고해주시고요.” 차 교감이 윤표쌤에게 신신당부하며 말한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숙소 도착해서 바로 확인 문자 드리겠습니다. 내일 뵙지요.”
세라초 플라잉디스크 팀은 오늘 6교시 마치는 대로 바로 밀양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경기 전날 미리 숙소로 가서 정리정돈을 해 두어야 일정을 치르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3년째 진행하는 전국대회 일정이지만 여학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처음이기에 좀 더 꼼꼼하게 스케줄을 확인하였다.
‘기왕 시합 뛰고 오는 거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잘 마무리하고 오자.’
“짐 여기다 놓으면 돼요, 부장님?” 6학년 부장 은남쌤과 신영쌤이 더플백을 버스 앞문에 올려놓으며 윤표쌤에게 묻는다.
“네, 맞습니다. 아이고 부장님이랑 신영쌤 저 때문에 주말에 이게 무슨 고생이세요.” 윤표쌤이 멋쩍은 표정을 하며 두 여자 선생님께 미안함을 표현한다.
“남자 선생님이 혼자 21명 여자애들을, 그것도 학교 밖에서 관리하는 건 너무 힘들죠. 저희가 숙소에서 여학생들 꽉 잡고 있을 테니까 부장님은 운동장에서만 애들 관리해 주세요. ”
“아이고. 말씀만 들어도 너무 감사합니다.” 6학년 여학생들이 전국대회를 앞두고 들뜬 마음에 다소 학교에서 소란을 피워댄 탓에 교장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로 여자 선생님들 2분을 전국대회 출장에 포함시켰다. 윤표쌤은 오히려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환경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와. 진짜 슬릭백 겁나 멋있게 추노. 이거 릴스 각인데?”
“이건 완전 미친 거야. 올리는 순간 바로 조회수 떡상임.”
버스에 올라타니 모든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쥐고 SNS 영상을 보며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느라 시끌벅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 주목. 인원 파악 하고 벨트 체크하고 빠뜨린 짐 혹시 없는지 확인해 보자. 멀미하는 사람 약 다 챙겨 먹었니? 개인 위생품이랑 머리끈은 반드시 개인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거야. 알겠지?”
“네.”
“그리고 선생님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집중해서 들어봐.”
“야. 적당히 조용히 하고 들어. 선생님 말씀하잖아.” 주장인 은정이가 박수를 치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집중하게 했다.
“너희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 이유는...”
윤표쌤이 잠시 학생들의 눈망울을 찬찬히 살펴보며 주위를 살핀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야.”
학생들의 흐리멍덩한 눈빛에 다소 힘이 들어갔다.
“나도 어른이잖아. 그리고 몇 달 동안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주문을 했냐. 그런데도 다 잘 헤아리고 들어주려 너희가 애썼기에 오늘 이 자리가 있는 거야. 그걸 나는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생각해.”
윤표쌤이 진지하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풀어내기 시작하면서 버스 안의 공기는 일제히 숙연해졌다.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이번 주말이 초등학교 6년간 한 페이지로 추억이 될 수 있기를 응원할게. 알겠니?”
“네!” 학생들이 단호하고 짧게 대답했다. 마치 지난 결승 무대에서의 대답을 방불케 했다.
“그럼 편히 쉬면서 갈 수 있도록. 이상.”
금요일 오후, 단풍 구경을 위해 지방을 찾는 행랑객들의 무수한 차량과 맞물리면서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만 2시간 여가 소비되었다. 학생들은 이내 단잠에 빠져 들었고 그 사이 윤표쌤은 종석쌤과 함께 학생들의 삼시 세 끼와 숙소 배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천에 능성이랑 대전에 봉진이 작년도 4강 팀인데 내일 저희랑 붙잖아요. 쉽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종석쌤이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하며 윤표쌤에게 말한다.
“그래도 우리 애들 열심히 했으니까 한 번 기대해 봐야죠. 오늘은 진짜 저녁 먹고 바로 취침해서 컨디션 관리 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근데 지금 이렇게 버스에서 오래 자 가지고 밤에 자겠느냐고... 크으... 새벽 2시, 3시 이렇게 자면 곤란할 텐데...”
“6 부장님 하고 신영쌤이 애들 방 수시로 드나드시면서 관리해 주시겠다니까 믿어보죠.” 윤표쌤이 말한다.
‘근데... 나 같아도 싱숭생숭해서 잠이 안 올 것 같다. 친구들이랑 언제 이렇게 밖에서 떼거지로 시간을 보내겠어.’
오후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밀양 IC로 들어온 차량은 30분을 달려 어두컴컴한 한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어귀에 잔잔한 주홍빛이 드는 조명으로 수 놓인 여러 채의 펜션들이 보였다. 그중 한 곳에 도착하여 학생들은 일제히 숙소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에 윤표쌤과 종석쌤은 사장님이 준비해 주신 저녁밥상을 체크하고 약속된 식단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취침 시간을 맞이한 학생들에게 윤표쌤은 내일 기상은 오전 7시라 안내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내일 개회식이 몇 시였더라.” 일정표를 주섬주섬 꺼내 살펴보니 오전 8시 반까지 집결하여 9시에 개회식이 밀양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질 계획이었다. 윤표쌤은 그렇게 일정 확인 후 샤워를 하고 종석쌤과 취침 인사를 한 뒤 곧바로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어둑어둑한 새벽, 숙소 밖은 이미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환호로 시끌벅적하다. 듣고 보니 귀신 이야기, 진실 게임 등으로 학생들이 대부분 3~4시간밖에 안 잤다고 한다. 그나마 은정이가 속한 방은 성향이 조용하고 비슷한 탓에 잠을 잘 잤고 나머지는 모자란 수면 탓에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이구 진짜... 너희 학교에서 매일 만나면서 뭐 여기까지 와서 궁금한 게 많아가지고 잠도 안 자고 그러냐?”
6학년 부장 은남쌤이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온 민아와 다언이를 보며 한 소리 한다.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니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민아와 다언이는 쥐 죽은 듯했다.
“사필귀정, 자업자득이다. 컨디션 관리 잘 한 사람과 못 한 사람은 시합에서 드러나겠지. 30분 내로 출발해야 하니까 얼른 씻고 버스로 옵니다.” 윤표쌤이 대충 국에 밥을 말아 두 세 숟갈 꿀떡꿀떡 넘기더니 일어서며 말한다.
제법 겨울 공기가 물씬 느껴지는 시골의 아침. 아침 공기가 이리 차가운 것을 보니 유난히 길었던 올여름도 드디어 그 끝을 보이는 듯하다. 그 고요함을 조심스레 깨우는 한 대의 빨간 버스가 부지런히 어디론가 달린다. 서울 시내에선 볼 수 없는 고즈넉한 풍경이 차창 밖으로 물씬 느껴진다. 인적 하나 없는 오솔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관광버스로 즐비한 운동장에 도착했다. 세라초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 인파가 몰려있는 개회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8시 20분임에도 전국의 수많은 초, 중, 고 학생선수들이 저마다 학교를 대표하는 유니폼을 입고 들뜬 마음으로 운동장에서 개회식을 준비했다. 이윽고 주최진의 안내 멘트와 함께 성대한 개막식이 열렸고 각종 내빈들의 소개와 행사 일정에 대한 안내 멘트가 이어졌다. 행사 내내 운동장에 자욱했던 연무가 거짓말처럼 서서히 걷혔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운동장의 뜨거운 열기를 대변하듯 따사로운 햇살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오... 피가 끓는구나...”
세라초 학생들의 마음속에 열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 들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