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때 지더라도 후회 없이 져야 할 것 아냐
“인천의 능성... 작년 남자 전국대회 준우승, 여자 전체 3위... 붙어 볼만 하지 않아?”
윤표선생님이 운동장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능성초를 바라보며 은정이에게 묻는다.
“그런데 쟤네들 팔다리가 왜이렇게 다 길어요? 오은서같은 애가 5명은 넘어 보이는데?”
은정이의 말을 듣고 보니 능성초 선수들은 하나같이 키도 크고 팔다리가 길어보였다.
“그래도 워밍업 하는 것 보니까 우리랑 작전은 비슷해보이는데? 쫄지 말어. 우리가 전부 키가 커서 전국대회 왔니?”
“그쵸? 그럼 저희는 저희 스타일대로 할 께요.”
“그래. 결국엔 누가 더 부지런하냐 싸움이야. 오, 잠시만. 교감 선생님 전화 오셨다. 네. 교감선생님. 아 저희 여기가 어디냐면...”
“교장선생님이랑 교감선생님 오셨나보다. 아. 실수하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하얀 단비 얼굴이 걱정으로 더욱더 창백해졌고 그걸 본 유진이가 단비를 뒤에서 와락 껴안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뒤에서 지금처럼 껴안아줄게. 어때?”
“아니야. 실수 한 번 더 했다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드는데. 헤헤헤.”
“아이고 우리 세라초 선수들 여기 다 모여있었구나.”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그리고 교육청에서 담당 장학사 분까지 오셨다.
“홍 부장님, 교육청에서 세라초 선수들 힘내라고 간식이랑 음료수를 얼마나 많이 보내셨는지 몰라. 일단 이것부터 아이들 나눠줍시다.”
살펴보니 세라초가 속한 동부교육청에서 선수들 이름 하나하나에 라벨링을 해서 간식상자와 음료수까지 보낸 것이었다. 그동안 받아왔던 혜택과 지원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지극정성이란 말이 어울렸다. 홍 부장은 선수들 전원 모아 기립 박수와 인사로 찾아와 주신 교장, 교감, 장학사님께 감사를 표하도록 했다. 그때였다.
“제3경기 10시 15분 서울 세라초와 인천 능성초 선수들 라인업 부탁드립니다.”
“쌤이 늘 강조한 게 뭐야?” 윤표쌤이 경기 시작 전 선발 선수들과 작전을 재빠르게 주고 받는다.
“쉬운 사람에게 패스하기요.” 은정이가 바로 대답한다.
“그리고 또 뭐 있어?”
“플라잉디스크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 바로 플레이 하는거요.” 우림이가 이어서 대답한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뭐였지...? 엔드 존 넘어가서 캐치하는 거?” 하은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찰나 누군가 나지막이 대답한다.
“서로 콜 플레이하는 거요.” 대답한 사람은 바로 주은이었다.
“그래. 너희가 대답한 게 정답이고 우린 그 정답을 지금까지 계속해 왔어. 오늘도 후회 없이 해보자고. 오케이?”
“오케이!!”
“구호 가자”
“세라! 세라! (쿵)(쿵) 파이팅!”
발구르기와 헹가래를 섞은 고유의 퍼포먼스로 전의를 다진 세라초 선수들은 그렇게 그라운드에 올라갔다.
“세라초 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풀!” 심판의 풀 사인과 함께 능성초와 세라초 선수들이 일제히 그라운드에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잽싸게 플라잉디스크를 잡은 능성초 선수가 눈짓을 하자 사이드에 포진해 있던 능성초 선수 둘이 기민하게 세라초 엔드 존 쪽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힘차게 포핸드 스트로크를 하자 엄청난 높이와 스피드로 궤적을 그리며 디스크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캐치, 능성초 득점!” 시작한 지 30초도 안 되어 실점을 하게 된 세라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괜찮아, 단비야. 저기 능성초 방금 10번 패스 한 친구 있지. 거기 패스 못하게 손 번쩍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담희는 10번 친구 옆에서 패스할 만한 사람 옆에서 귀찮게 하고. 알았지?”
윤표쌤은 수비가 좋고 활동 폭이 넓은 단비와 담희에게 전방 압박을 좀 더 타이트하게 할 것을 주문했다. 능성초의 풀로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고 그라운드 한쪽 깊숙한 곳에서 우림이가 디스크를 잡았다.
평소엔 포핸드로 패스할 궤적이 쉽게 나왔지만 능성초의 조직력은 확실히 남달랐다. 패스를 줄 만한 타이밍과 각도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유난히도 오늘따라 하은이와 은정이의 발이 무거웠다. 우림, 하은, 은정이가 움직임이 둔해지자 허리 라인에 있던 서윤이와 주은이가 수비 라인까지 활동 폭을 넓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엔드 존까지 뛰어가는 데에 체력적인 어려움이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우림이가 오른쪽 라인 빈 공간으로 뛰어가는 서윤이를 포착했고 지체 없이 패스했다. 꽤 아름다운 궤적으로 날아가는 디스크를 끝까지 쫓아간 서윤이가 점프하여 마침내.
“캐치, 세라초 득점!”
세라초 벤치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남학생의 무리도 동시에 기뻐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알고 보니 남자 서울시 대표로 참여한 곡현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기고 싶었던 곡현초는 우리를 위해 말하지 않아도 저렇게 응원해 주는구나. 좀 부끄럽네.’
윤표쌤은 한마음이 되어 세라초를 응원하는 곡현초의 모습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잠시, 작전 타임을 통해 선수들을 대거 교체한 능성초에서 아까 봤던 길쭉한 친구들이 3~4명씩 투입되었다. 투입된 친구들은 본인들끼리 맞춤식 전술을 활용해 순식간에 세라초를 압박했고 가뜩이나 뒷공간 침투에 약한 세라초에게 그야말로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그렇게 전반 10분이 종료되고 점수는 1:6. 세라초가 5점 뒤진 채 마무리되었다.
“이 정도면 금방 극복돼. 우리가 실점 1점을 막고 차근차근히 득점 1개씩 해내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
윤표쌤이 선수들을 독려하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지만 선수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막상 뛰어보니 실력 차이가 확실히 느껴진다는 것을 선수들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3분 정도 뛰고 정 안되면 B조, C조에게 기회를 주고 2경기를 노려야겠다.’
윤표쌤은 지그시 선글라스 뒤로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다짐했다.
“후반전 시작하겠습니다. 능성초의 풀부터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풀!”
전열을 가다듬은 세라초는 심기일전하여 은정이의 패스부터 차근차근 공격을 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팔이 유난히 긴 능성초 선수들의 수비에 좀처럼 패스 전달이 매끄럽지 않았고 이어서 곧바로 역습을 내주고 점수를 내주었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9:1. 경기는 거의 능성초의 완승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저희 선수 교체하겠습니다. A조 전부 나오고 B조 정유진, 정서윤, 오은서, 김해린, 조민아, 김지우, 구민서 투입.”
B조 선수들은 헐레벌떡 일어나 그라운드로 모두 뛰쳐나갔고 윤표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A조 선수들을 다독이며 벤치에서 쉬게 했다. 은정이를 비롯한 모든 선수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그라운드를 바라볼 뿐 어떠한 대화도, 감탄사도 하지 않았다.
“민서야. 너부터 공격이 전개되야 되고 은서는 뒤에서 최종 수비, 유진이가 허리라인, 지우랑 민아, 해린이는 백코트 하지 말고 그냥 공격 쪽에서 대기해. 찬스 나면 바로 엔드존으로 뛰어들어가고.”
윤표쌤은 남은 시간 B조를 통해 최대한 점수차를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선수들도 최선을 다했다. 롱패스로 일관하던 작전에서 B조의 장기인 숏패스 전법을 구사하니 마침내 찬스가 났고 민서가 지체 없이 엔드 존에 뿌린 패스를 해린이가 캐치했다. 2:10 남은 시간은 3분으로 승패에 큰 영향이 없는 점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세라초 벤치에 화색이 도는 순간이었다.
“저희 선수 교체 하겠습니다. 유진이랑 민아는 남고 나머지 B조 전부 들어오시고. C조 권세아, 임주희, 구도연, 장다언, 김민하 투입.” 그렇게 C조 선수들은 남은 3분동안 상대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종료 휘슬이 울렸다. 2:14. 그야말로 능성초의 완승이자 세라초의 완패였다. 상호 경례 후 그라운드를 떠나 관중석 한쪽 세라초 대기석으로 이동하는 길은 그야말로 천리길 같았다. 선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세라초 여러분들 너무 잘했어요. 선생님은 너희가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뛰어준 것에 대해서 너무 훌륭하고 대견하게 생각해요.” 장학사님의 위로와 함께 경기를 지켜본 6학년 선생님들도 학생들의 처진 어깨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학생들의 울음보가 연속적으로 터지기 시작하더니 눈물샘이 그야말로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소리 없이 분을 삭이며 우는 선수도 있었고 꺼이꺼이 억장이 무너진다는 듯 엉엉 우는 선수도 있었다. 그리고 윤표쌤은 그 모습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보다 못한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 울고 있는 선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했지만 선수들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세라초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초상집과도 같았다. 10분 여가 지났을까. 어느 정도 마음속의 응어리를 해소해 냈는지 학생들의 울음소리가 잦아졌고 윤표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약 올라 죽겠지?”
윤표쌤의 한 마디에 선수들은 일제히 윤표쌤을 쳐다보았다.
“밀양까지 생고생을 해서 왔는데 시작부터 완전 깨지니까 열받지 않아?” 윤표쌤의 말에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왜 그렇게 눈물이 끝도 없이 가슴속에서 흘러나왔는지 알아?” 윤표선생님이 묻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윤아가 손을 들어 이야기한다.
“저희가 너무 말도 안 되게 아무것도 못하고 져서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윤아의 말에 학생들이 수군거리며 동의하기 시작했다.
“뭐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긴 한데. 그것보다는...” 윤표쌤이 윤아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를 하다 단호하게 얘기한다.
“그건 너희가 올해 처음으로 져 봤기 때문이야.”
선수들의 눈망울이 동그래지고 또다시 수군거리면서 ‘맞네, 그러고 보니.’ ‘맞아, 맞아’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올해 져 본 적이 없어. 늘 이기기만 했고 다른 팀이 지고 우는 것을 바라만 봤어. 너희의 오늘 패배가. 그냥 패배도 아닌 완패가 오늘 처음이었던 거야. 당하고 나니까 기분이 어때?”
“기분이 정말 안 좋네요. 최악이에요.” 윤표쌤의 질문에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럼... 2경기는 죽기 살기로 해봐. 이제 울만큼 울었으니까.”
윤표쌤이 가방에서 플라잉디스크를 대여섯 개를 꺼내 은정이에게 주면서 말한다.
“저기 빈 공터에 가서 2~3명씩 패스 연습 시켜. 뭔 일 있으면 나한테 와서 얘기하고.”
“자! 새솔 다 여기로 모여! 플디 가지고 가서 연습해. 빨리 흩어져!”
“에잇!” 눈이 벌개진 채로 하은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공터로 뛰어가자 다른 친구들도 모두 뛰어나가 패스 훈련을 시작했다. 선수들의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진 윤표쌤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1경기에서 모든 선수가 빠짐없이 경기에 뛰었다.
2경기에서의 명분을 찾았다. 이젠 진짜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