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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웅 Sep 19. 2019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다

권력의 배반, 대중의 책임

소설은 늙은 수퇘지 메이저의 연설로 시작됩니다. 그는 동물들을 향한 인간들의 횡포를 지적하며 동물들의 행복과 평등을 외칩니다. 이후 돼지들의 주도 아래 메이너 농장 동물들은 주인 존즈를 몰아내고 농장을 차지합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고된 노동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모든 동물이 평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혁명이었습니다. 동물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칩니다. 이념가 메이저가 숨을 거둔 후, 젊은 수퇘지 나폴레옹의 주도 아래 그들의 사상체계를 <동물주의>라 명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권력구조가 형성됩니다. 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그들 몫으로만 빼돌리면서부터 권력은 타락행 고속버스를 탑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현실의 독재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젊은 돼지 선동꾼 스퀼러가 가장 얄밉습니다. 검정도 하양으로 만들어내는 그의 언변은 나폴레옹 일당의 권력이 유지되는 데에 적재적소로 활용됩니다. 우유가 오직 돼지들의 몫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들켰을 때, 스노볼을 무력으로 쫓아냈을 때에도 그럴 듯 한 이유를 대며 동물들을 안심시킵니다. 권력 유지를 위한 그의 불쾌한 말솜씨는 끝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일곱 계명>을 바꾸는 것, 나폴레옹을 위한 각종 칭호와 시를 만드는 것, 동물농장에 생기는 각종 악재를 스노볼의 계략으로 치부하는 것, 상처뿐인 <풍차 전투>를 거대한 승리로 포장하는 것, ‘자유’의 가치를 왜곡하며 고된 노동에 지친 동물들을 고무시키는 것, 복서가 도살업자에게 끌려간 일은 오해라고 해명하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귀여운 돼지들이 어쩌다...

오랜 시간이 지나 권력자 나폴레옹은 무게 24스톤의 성숙한 수퇘지가 됩니다. 농장 또한 그 자체로 부유해졌지만 거기 사는 동물들은 노동 착취와 빈곤으로 <반란> 이전보다 암울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스퀼러는 동물들에게 '노예가 아닌 자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초 여름날, 동물들은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마주한 채 발걸음을 멈춥니다.


돼지 하나가 두 발로 서서 걷고 있었다. 스퀼러였다. 그는 상당한 덩치의 몸뚱이를 두 발로 지탱한다는 것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듯 약간 어색하게, 그러나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뒷발로 서서 마당을 걷고 있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돼지들이 길게 한 줄로 행렬을 지어 본채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모두 스퀼러처럼 뒷발로 선 직립보행의 자세였다.


타락한 권력의 편에 선 돼지들은 그들이 증오하고 미워했던 인간들처럼 두 발로 서서 걷습니다. 더불어 자유와 평등을 위한 '일곱 계명'은 오간 데 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 남아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마침내 돼지 무리와 인간들은 방 안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서로의 화합을 기념하고 카드 게임을 합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합과 평화는 온데간데없이 방 안에서 고함소리와 탁자 치는 소리가 들리고 돼지들과 인간들이 싸우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돼지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돼지가 되는 아이러니입니다.


저자는 이 책이 비단 구소련만이 아니라 독재 일반에 대한 글이라 말합니다. 나는 더 나아가 이 소설을 권력 일반으로 확장시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가치를 만듭니다. 가치는 이념을 만듭니다. 이념은 체계를 만듭니다. 체계에는 권력 구조가 존재하고 권력 구조 안에서 언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재구성합니다. 언어는 애석하게도 가진 자들의 편에 유리하게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돈 없고 힘없는 우리 민중에게는 언어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언어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동물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동물주의>가 독재와 파국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은 ‘언어’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돼지들은 석 달 동안 자기네끼리 헌 철자법 책을 주워 문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욕망에 사로잡힌 돼지에게 언어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권력과 안위를 위한 무기로 쓰인 것입니다.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건설업이 아니라 살상 무기로 오용된 것처럼 말입니다.


돼지 권력의 부패는 동물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매사에 무지하고 무기력합니다. 돼지들이 읽고 쓰는 것을 거의 완전히 깨우쳤을 때, 다른 동물들은 알파벳을 겨우 깨우치거나 그러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클로버는 '일곱 계명'이 시나브로 수정되는 것을 자신의 착각이라 여기며 자책합니다. 스퀼러의 선동에도 고개만 끄덕이며 지나칠 뿐입니다. 근면 성실하게 일만 했던 복서는 노동 착취로 삶을 소모합니다. 벤자민은 다른 동물보다 현명하고 지적이지만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답답한 당나귀입니다. 닭과 양들은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우둔한 대중입니다. 비단 독재와 부패의 책임은 권력 집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가치에 무관심하고 우매한 자들에게도 그 책임은 할당되어 있습니다.


현시대에 비하면 불평등과 계급이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던 일련의 과거 역사는 솔직한 편입니다. 현시대는 겉으로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합니다. 불평등이 당연하다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비통합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기는커녕 그들은 본래 천성이 게으르고 더럽다는 말을 뱉어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더불어 스스로를 소시민으로 격하시키고 욕망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불의와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한 대중들로 수두룩합니다.


나는 풍차를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 - 복서

민주 사회 안에서 대중은 살아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대중이 눈을 뜨고 지도자를 건강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사회의 질서와 가치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언어와 교육을 통해 진정한 자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비범하다 칭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스퀼러와 나폴레옹에게 선동되고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말과 글을 뱉어야 합니다. 그것이 언어의 정의로운 힘입니다.


나는 <동물농장>을 읽으면서 오웰에게 감탄했고 <자유와 행복>, <나는 왜 쓰는가>을 읽고 나서는 오웰에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덩달아 <1984>가 읽고 싶어 지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바득바득 우기고 싶을 정도로 좋은 책입니다. 권력의 부패, 혁명의 배반에 대한 훌륭한 우의・풍자 소설입니다. 추천합니다. :0


2019.09.18 (수)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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